생활 이야기

김지하가 '깡통' 백낙청 걷어찬 10가지 이유!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2. 12. 4. 23:42

 

[김지하 칼럼] 종친초(종북-친북-떼촛불 혼합체) 문화권력에 대한 선전포고! ②

김지하가 '깡통' 백낙청 걷어찬 10가지 이유!

"문화대국으로 가는 한류-르네상스 분출 가로막는 못된 쑥부쟁이!"

종친초 문화권력에 대한 강한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한 大시인 김지하.ⓒ
▲종친초 문화권력에 대한 강한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한 大시인 김지하.ⓒ

강원도 원주의 부론·문막 옆 손곡에 있는, 고려 이전부터 유명한 법천사(法泉寺)와 새로이 등장한 거돈사(居頓寺).
두 절 사이가 매우 가까운데도 길이 없다.
시퍼런 독초와 독거미풀만 무성하다.

법천사의 섬세·심오한 유식학인 법상종과, 참선으로 일관한 거돈사의 선종(禪宗) 사이에 무엇이 가로막고 있길래?
그곳은 컴컴 칠흑 속 텅 빈 지름길 위에 못난 쑥부쟁이가 한 송이 피어 있을 뿐이다.

쑥부쟁이 <출처:민족문화대백과>
▲쑥부쟁이 <출처:민족문화대백과>

이 부근엔 절절한 사연을 가진 장소가 많다.
견훤이 15만 정예 병력으로 문막을 노리며 기다리던 후용.
궁예와 왕건이 수십만 대군을 부딪쳐 싸운 문막 벌판.
오대산 월정사까지 이어지는 구룡사를 비롯한 화엄 사찰들.
여성적 경제 원리의 상징인 팔여사율(八呂四律)이라는 이름의 월봉.
그 봉우리 옆에 충청도의 단강, 강원도의 섬강, 경기도의 남한강이 합수(合水)하는 '흥원창'.

절절한 사연을 가진 장소가 주변에 즐비하건만, 법천사·거돈사 사이에는 독초·독거미풀·쑥부쟁이가 버티고 있다.

우리 문화계도 똑같다.
곳곳에 막강한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건만, 독초·독거미풀에 이어 머얼건 쑥부쟁이같이 누군가 길목을 막고 버티고 있다.

싸이의 말춤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오바마가 참석하는 공연의 대미를 장식한다.

욘사마에 이어 한류의 붐이 와 있다.
한류-르네상스의 핵은 '시와 문학의 참다운 모심'이다.    

그런데 이 못된 쑥부쟁이가 한류-르네상스의 분출을 가로막고 있다.

잘라 말한다.

자칭 한국 문화계의 원로라는 '백낙청'이 바로 그 쑥부쟁이다.

왜?

백낙청은 문학자인가 정치평론가인가? 그 정체가 아리송하다. 한명숙과 이정희를 양 옆에 세우고 이른바 '야권연대'를 윽박질러 성사시키는데 앞장섰다.  백낙청 뒤 원 속의 인물은 무단으로 북한으로 넘어가 김정일 죽음을 조문한 범민련 남측 부의장 노수희.  ⓒ
▲백낙청은 문학자인가 정치평론가인가? 그 정체가 아리송하다. 한명숙과 이정희를 양 옆에 세우고 이른바 '야권연대'를 윽박질러 성사시키는데 앞장섰다. 백낙청 뒤 원 속의 인물은 무단으로 북한으로 넘어가 김정일 죽음을 조문한 범민련 남측 부의장 노수희. ⓒ

첫째, 백낙청은 한국 문학의 전통에 전혀 무식하다.
그저 그런 시기에 '창비'라는 잡지를 장악해 전통적인 민족문학 발표를 독점했을 뿐이다.

둘째, 백낙청은 한류-르네상스의 핵심인 '시'의 '모심'에서 가장 중요한 리듬, 즉 시 낭송의 기본조차 전혀 모른 채 북한 깡통들의 '신파조'를 제일로 떠받들고 있다.
우리 시 문학의 낭송에는 적어도 아홉 가지의 당당한 방법이 있는데도 여기에 대해선 전혀 무식하다.

셋째, 수십년 동안 창비출판사에서 단 한 번도 지나간 한국 시문학사의 미학적 탐색을 시도한 적이 없다.
무식 때문이다.

넷째, 그는 그 긴 세월을 내내 마치 한국 문화사의 심판관인 듯 행세해왔고 그 밑천을 겨우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소설가 몇 사람 공부한 것으로 내세워 왔다.


백낙청의 사상적 스승이란 리영희. 그는 수천만명을 죽인 모택동을 미화했고 문화대혁명을 찬양하는 수많은 글들을 써댔다.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 그의 책들이 386, 486 세대에 끼친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백낙청의 사상적 스승이란 리영희. 그는 수천만명을 죽인 모택동을 미화했고 문화대혁명을 찬양하는 수많은 글들을 써댔다.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 그의 책들이 386, 486 세대에 끼친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다섯째,

그의 사상적 스승이라는 '리영희'는 과연 사상가인가?
깡통 저널리스트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리영희를 앞세워 좌파 신문에서 얄팍한 담론으로 사기행각을 일삼는다.

여섯째,
그의 평론 행위는 평론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그것은 공연한 '시비'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박경리씨의 소설 <시장과 전장>에 관한 평이다.
그것도 문학 평에 속하는가?
너절하고 더러운 방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발표하고도 '심미 의식'인가?

일곱째, 그 깡통 같은 시국담이다.
무슨 까닭인지 그의 입은 계속 벌려져 있는 상태다.
그렇게 벌린 입으로 과연 지하실 고문은 견뎌냈을까?
그런데 하나 묻자.
백낙청은 지하실에 가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여덟째,
계속되는 졸작 시국담에 이어 '2013 체제'라는 설을 내놓았다.
그것도 시국 얘기인가?
아니면 막걸리에 소주를 섞어 먹은 상태인가?
그런 짓 하면 안 된다.
그러고도 '원로'라니?

문재인-안철수 후보 단일화를 압박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백낙청(오른쪽).
▲문재인-안철수 후보 단일화를 압박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백낙청(오른쪽).

아홉째, 백낙청은 우선 정치관부터 바로 세워라.
그런 것도 없는 자가 무슨 정치 평을 하는가?
내가 '깡통 빨갱이'라고 매도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알라!
마르크스는 읽었는가?
<자본론>은 읽었는가?
<경제학·철학본고>는?
<도이치 이데올로기>는?

열째,
마지막으로 묻자.
문학을 해서 날조하려는 것이냐?
본디 '시 쓰기'는 고통의 산물이다.
사람은 사회에서 '원로' 대접을 받기 전에 먼저 삶의 '원로'가 되어야 하는 법이다.

이제 이 민족은 지난 시절을 훌쩍 벗어던지고 있다.
이번 선거의 개 똥구멍 같은 온갖 개수작들이 역설적으로, 과거가 끝났다는 증거이다.

문학자는 참된 마음으로 문예를 부흥시켜 이 나라를 '문화대국'으로 키워가야 한다.
이게 바로 15세기 피렌체 르네상스에서 배워야 하는 테마다.

각오가 돼 있는가?
스스로를 욕할 준비가 돼 있느냐는 것이다.

손곡 쑥부쟁이가 스스로 사라지는 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뜻밖에도 많다.
알았는가?

"백낙청은 쑥부쟁이다!" 김지하 시인의 호통이다.
▲"백낙청은 쑥부쟁이다!" 김지하 시인의 호통이다.

[조선일보 12.4 '특별기고'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