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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下)‥산이 바다를 품어 만든 항구…구름도 쉬어 간다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0. 5. 24. 10:35

경남 남해(下)‥산이 바다를 품어 만든 항구…구름도 쉬어 간다.

 

금산과 물건방조 어부림

셔틀버스를 타고 남해 금산(681m)을 오른다. 버스에서 내려 20여분쯤 산길을 걸어 들어가자 신라 신문왕 3년(683)에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보리암이 불쑥 얼굴을 내민다. 보리암은 대장봉이라는 커다란 암봉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삼층석탑과 해수관음상을 돌아본 후 이내 화엄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오른다. '華(화)'는 花(화)보다 먼저 생긴 꽃을 가리키는 한자다. '화엄'이란 '광대무변하게 우주에 편만해 있는 붓다의 만덕(萬德)과 갖가지 꽃으로 장식된 진리의 세계'를 의미한다. 화엄봉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외경심이 생기는 거대한 암봉이다.

화엄봉을 지나 금산 정상으로 오르는 산길에서 흔들바위가 있는 쪽으로 내려가면 금산산장이 나온다. 산장 마당가에 서서 금산의 남쪽 끝에 있는 상사바위를 바라보노라니 이성복의 시 '남해금산'이 떠오른다.

◆산의 영혼에 비단을 입힌 시 '남해 금산'


고려 말 이 산에 찾아온 이성계는 자신이 왕이 되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둘러 주겠노라고 산신령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왕이 된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단지 보광산(普光山)이란 원래의 이름 대신 '비단 금'자 금산(錦山)으로 고쳐 부르도록 했을 뿐이다. 이 구두선을 바로잡은 건 600여년 뒷사람인 이성복 시인이었다. 그는 '남해 금산'이라는 아름다운 시로써 이 산에 진정한 의미의 비단을 입힌 셈이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남해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나는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라는 구절에서 사랑의 추수성 내지는 부화뇌동성을 읽는다. 마치 '봄날은 간다'라는 대중가요의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현상에 비견할 만하다. 그 맹목성이 돌이라는 고체마저 액체로 만들어버리는 화학 변화를 일으킨 것일까. 시 속의 화자(話者)는 여자가 들어간 돌 속으로 따라 들어간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동화되려 하거나 같아지려고 하는 부단한 운동이다. 그러나 시 속의 화자가 추구했던 사랑이라는 운동은 끝내 허사가 되고 만다. 비가 많이 온 어느 여름날 여자는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가버리는 것이다. 떠나가는 여자를 끌어주었던 건 해와 달이었다. 이 두 개의 아득한 물체를 매개로 삼은 이 사랑의 설화를 반복해서 읊조리노라면 어느새 아련한 슬픔에 물드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서정인 소설 '산'의 무대 금산산장



또 금산산장은 서정인의 소설 '산'의 무대이기도 하다. 섬(남해)의 한 중학교로 발령난 총각 교사가 여수-항주 간 연락선을 타고 임지로 가는 배 안에서 우연히 아이가 딸린 미인을 만나게 되고 함께 덕산(남해 금산)에 오른다. 둘은 산꼭대기 여관(금산산장)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서 이튿날 헤어져서 각자 다른 길로 하산한다. 소설은 아름다운 것에 가까이 가려는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을 가로막는 운명이라는 걸림돌 앞에 속수무책으로 주저앉아 버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 개의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가슴에 품은 채 남쪽으로 뻗은 능선의 맨 끝에 자리잡은 상사바위로 간다. 여수 돌산에 사는 한 총각이 남해에 고기 잡으러 왔다가 우연히 만난 과수댁을 사모한 끝에 상사병에 걸려 죽을 처지에 있었다. 시들시들 죽어가는 머슴을 보다 못한 과수댁은 금산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바위로 데려가 회포를 풀게 해주었다는 전설이 서린 바위다.

사랑에는 '위험성'이라는 속성이 숨어 있다. 적당히 사랑하면 즐거움이다. 그러나 치열하게 사랑하면 '죽음'을 앓게 된다. 상사바위가 아슬아슬한 천길 벼랑 끝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극적인 상징이다. 상사바위에서 내려다보는 다도해엔 잔뜩 연무가 끼어 있어 신비감을 연출한다. 저 연무 속에서 불쑥 돌 속에서 떠나간 여자의 환영이라도 어릴 듯하다.

안병기 여행작

● 찾아 가는 길

서울에서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경부고속도로→비룡 분기점→통영 대전고속도로→진주 분기점→남해고속도로(순천 방면)→하동 나들목→19번 국도(남해 방면)→남해대교를 지나면 남해에 도착한다. 남해읍에서 이동면 복곡탐방지원센터를 통해 금산에 오를 수 있다. 항공편은 사천공항을 이용해 창선대교로 들어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