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선교사의 눈으로 본, 1954 年 대구…
최근 한 네이버 블로거가 올린 1954년의 대구 사진들이 네티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그 주인공은 '초보늑대'님. 그는 지난 3일부터 6일까지 자신의 블로그에 한 미국인이 소장하고 있던
사진들을 블로그( http://blog.naver.com/texasatm/ )에 공개했다.
미국 텍사스주에 거주하고 있는 그는 "아내가 영어를 배우러 다니는 미국 교회의 애덤(Adam)이라는
선생님의 저녁 초대가 있었다"며 "한국인들만 초대하는 저녁식사였는데, 전에 한국에 가본적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방문을 했다가 1954년의 대구 사진들을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애덤은 79세의 적지않은 나이에도 교회에서 외국인을 위한 영어교육 자원봉사를 하고
있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복구가 한창이었던 1954년부터 1955년까지 대구에서 2년간 교회 봉사활동을
자원해서 한국에 왔었다고 한다.
한국에 방문했을 때는 그가 미국에서 갓 의과대학교를 졸업한 후였다. 그는 한국에 대해서 "당시 한국인
들이 모두 검은 머리를 하고, 하얀 옷을 입었다는 것이 인상깊었다"고 회고했다. 또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한국의 지게가 무거운 짐을 들어도 힘들지 않게 설계된 아주 훌륭한 물건이었다"고
'초보늑대'님에게 칭찬했다고 한다.
'초보늑대'님은 "애덤씨가 한국에 대해서 너무 오래된 기억들만 가지고 있었다"며 "그래서 현재 한국의
사진과 영상을 보여줬더니 한번 가보고 싶은데, 이젠 나이가 많아서 여행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고 전했다.
그는 마지막 사진을 올리며 "최근 반기문 총장의 아프리카 방문 사진을 인터넷으로 봤는데, 한국의 1950
년대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며 "자만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 아래는 '초보늑대'님이 애덤씨에게 받은 사진들이다. 애덤씨는 인터넷에 사진을 소개하는 것을
흔쾌히 허락했다고 한다.
▼줄을 서서 분유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Adam은 당시 한국인들이 우유를 잘 소화시키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잘 모르고 진하게 분유를 줬다가 모두 배탈이 나 한 동안 우유 배급을
거부했었다는 일화를 이야기했습니다.
▼공공 화덕에서 분유를 더운 물에 타고 있는 모습입니다.
▼분유를 데우고 있는 모습입니다.
▼마을에 있는 공동 화로에서 분유를 타고 있는 사진 입니다.
어른들 앞에서 짝다리로 서 있는 처녀가 인상적이네요.
▼피난민촌에서 분유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들입니다.
▼분유를 배급 중입니다. 이분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피난민촌의 우유를 마시는 사진입니다. 개인적으로 사진속 분들의 지금 근황들이 궁금해 집니다.
▼피난민촌의 전체 풍경입니다.
▼피난민촌의 사진입니다. 피난민촌에는 화재가 자주 일어났다고 합니다.
▼전쟁의 모습이 아직 남아 있는 사진입니다
▼원조물품에 대한 환영행사에 학생들이 동원된 것 같은 사진입니다.
전쟁 후의 모습들인데도 밝은 표정들입니다.
▼추수를 하는 들판의 모습입니다. 전쟁 때문이었는지 산에 나무가 하나도 없어 보이는군요.
▼추수를 도와주고 있는 Adam의 젊은 시절 모습입니다. Adam은 지게에 대하여 무거운 짐을 지어도
힘들지 않게 설계된 아주 훌륭한 물건이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을 방문한 Adam과 아이들의 사진입니다.
▼소시장의 풍경입니다. Adam은 한국인이 모두 검은 머리에 하얀 옷을 입었다는 것이 인상깊었다고
회고했습니다.
▼Adam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중 하나인 한국 노인들이 담배를 피우는 사진 입니다.
이 사진은 Adam의 집 한켠에 걸려 있던 사진 입니다.
▼돼지를 팔러 장터로 가는 한 아저씨의 사진입니다.
▼그 당시 보기 드물었을 것 같은 직업여성이군요. 교통정리 아가씨. 멋지네요.
▼대구에 있는 한 유치원이라고 합니다. 일본식 건물이 눈에 띄는군요.
그래도 저기 계신 분들은 그 당시 여유가 있으신 분들의 자제들이겠군요.
▼현재의 Adam과 아내 Alice의 모습입니다.
출처 = '초보늑대'님 블로그 : http://blog.naver.com/texasatm/150014112537
50년대 대구 모습 슬라이드 제공 아담씨 인터뷰 | |
"젊은 시절의 대구 순박한 인심 떠올라"
| |
본사는 1954년 대구의 생활상을 담은 컬러사진을 입수 한 뒤 블로그(http;//blog.naver.com/texasatm)에 처음으로 사진을 올렸던 미국 유학생 정찬권씨를 통해 당시 사진을 촬영했던 아담(Adam Ewert,Ph.D.80)씨와 e메일 서면 인터뷰를 가졌다.
본사에 제공한 사진들은 아담씨가 한국전쟁 직후 복구가 한창이던 1954년부터 2년간 교회 봉사활동 차 대구에 머물면서 촬영한 것이다.
대구를 비롯해 해외 오지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아담씨는 미국 텍사스 의대 미생물학 교수(의사)를 퇴직한 뒤 현재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원봉사로 교회에서 외국인을 위한 영어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 당시 어떤 목적으로 대구에 왔나
▲ 기독교 단체인 MMC(Mennonite Central Committee) 활동을 자원해 대구에 왔다. 주로 구호물품 배급 등의 활동을 했다.
-- 대구에 얼마나 머물렀나
▲ 1954년부터 2년간 대구에 거주하면서 때때로 부산도 방문했다.
-- 촬영 당시 대구 및 한국에 대한 소감은
▲ 첫 외국생활이라 모든게 신기했다. 당시 도시 지역은 좀 위험했지만 시외로 나가면 사람들이 친절하고 안전했다. 도시에서는 구호물품을 지키고 있어야 했지만 시골에서는 아무도 손대는 사람이 없었다.
-- 사진을 촬영한 특별한 이유는
▲ 대구가 미국 밖으로 나와 봉사하는 첫 기회여서 많은 기대감으로 대구에서 보고 느낀 것을 사진으로 남기려 했다.
-- 당시에는 귀한 슬라이드필름을 사용한 이유는
▲ 처음으로 경험한 외국의 모습을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보다 선명한 사진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 한국에서 슬라이드필름을 어떻게 구했나
▲ 미군부대 PX(매점)에서 구입했다. 군인은 아니었지만 출입 허가가 있어 비교적 쉽게 구입했다.
-- 촬영 당시의 구체적 기억이 있다면
▲ 너무 오래전 일이라 대부분의 기억이 없다.
-- 촬영 당시 힘들진 않았나
▲ 사진을 찍을 때 사람들이 모두 호의적이었다. 특히 아이들이 많이 좋아 했다.
-- 왜 이제까지 사진을 공개하지 않았나
▲ 한국인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사진을 보여 줬다. 그러나 한국에 사진을 공개할 한국친구가 없었을 뿐이다. 그들은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1950년대 칼라사진에 놀라워했다. 이번 기회가 인쇄매체에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이다.
-- 다시 대구를 방문할 계획은
▲ 장거리 여행을 하기에는 아내의 건강과 내 나이가 좀 많다. 현재 내 거실에는 한국에서 촬영한 많은 사진을 붙여두고 있다. 이 사진을 통해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 마지막으로 한마디
▲ 미국에 와 있는 많은 한국인들을 보면 한국이 놀랍도록 발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쁘다. 내가 촬영한 사진을 보고 많은 한국 사람들이 좋아 한다니 더욱 기쁘다.
/이상철기자 finder@msnet.co.kr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위 사진속 난민촌 아이들중 한사람이었던 이영식씨.
(사진 매일신문)
북한 출신으로 전쟁때 남쪽으로 피난와 당시 난민촌에 살았던 이영식씨가 본지에 실린 당시(1954 年)의 사진속 아이들중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며 반가워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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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구의 모습 120장을 모두 보시려면 매일신문 홈페이지
http://www.imaeil.com/event/zb/bbs/zboard.php?id=1954 로 가시면 볼수 있습니다~
(사진 Adam씨 제공.)
웬지 눈물난다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특히 반기문 사무총장이 최근 아프리카 방문한 사진보니 마치 우리나라 1950년대 같았다면서...
자만하지 말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말...인상깊네요..........
지금 우리의 삶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행복한 삶에 대한 감사의 노래로서 일상의 삶이 기쁨이 되시기 바랍니다.
먹고, 마시고, 자고, 보고, 듣고, 말하고, 숨쉬는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그럼에도 어느 목사는 사택이 좁다고, 주위에 소똥 냄세가 난다고,
도시임에도 아이들 교육시키기 어렵다고, 큰 아파트를 얻어 달라고
요구하여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밀어 부쳐 약속된 것 보다
더 큰 것으로 이사간 거짓말쟁이 목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옹호하고 추종하는 잘못된 사람들로 말미암아
잘못을 깨닫고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주님의 뜻이 아닌 목사의 욕심을 따라 나아갑니다.
물론 많은 교회들이 좋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이곳은 부천과 시흥의 경계선 가까운 곳에 있는
어느 잘못된 교회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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