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나이 “50청춘”(Best Age)
진짜인생이 시작된다
●종교와 믿음
신과 믿음은 매우 유사한 인식과 확신을 가지고 지난 수천 년 동안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이어져왔다. 하지만 반드시 평화적으로 찬양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신과 믿음은 오늘날에도 지배를 위한 수단과 구실로서 종교적 권력
도구 중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현대의 종교 중에는 대단히 공격적으로 변한 종교도 있다. 그 종교는 전투적인
무언가를 믿음과 신으로 대체하여 가공할만한 공격력을 보이기도 한다. 나는
기독교적인 제도와 이미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지만, 믿음의 영적인 면에서는
아직도 매혹되어 있다.
흔히 사람들은 기독교의 양대 교파인 가톨릭과 개신교의 건물에서,
19세기 말까지는 종교적인 장중한 양식을 보며, 영혼이 깃들어 있는
깊고 자연스러운 확신을 가졌고, 또한 느꼈다.
이런 건축물이 원래대로 보존되어 있다면, 그 건축물들을 보면서 인간의
믿음으로부터 어떤 힘이 생겨났었는지를, 그리고 인간이 모든 예술품,
건축물, 장식품에서 어떤 업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를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와 불교 등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말이다. 이런 믿음은 물질주의 -물질주의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왔지만, 영성이 결여된 채 형식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라 할 수 있다. 도덕성과 믿음을 통해 우리는 의심
대신 안정과 확신을 느낄 수 있고, 간혹 생기는 종교적인 회의를 떨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곳, 예를 들어 나의 가정,
주위의 자연, 내가 손 댈 수 있는 예술, 창조의 의무라고 느끼는
내 행동에서 신성한 것을 찾고자 한다.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창조의 위대함은 우리가 그 창조에 직접 참여할 때 경험할 수 있다.
즉 신을 경험하고 싶어 하고, 창조라는 힘의 원천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신의 존재 증명이 가능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창조라는
힘의 원천은 그 숭고함에 있어서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순간에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인류의 계속적인
발전을 위해서 미약하나마 이바지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참고로 종교적인 영성에 대한 보편적인 욕구를 악용하는 이데올로기화된
행동주의자들은 결코 건전한 종교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삶의 원천은, 즉 믿음은 독선적이지도 공격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평화롭고 건설적이며 모든 인간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
이런 모습일 때에야 비로소 믿음은 의지할 수 있는 터전이 될 수 있으며,
평화로운 공존의 토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가는 길은 항상 열려 있다. 또 조건도 없다.
믿음으로 가는 길이 조건 없이 열려 있다는 사실 역시 나는 창조의
커다란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세대간의 대화
오십이 된 우리가, 자라는 젊은 세대와 인생이라는 길을 함께 걸어가고
싶어 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인식을 같이 나누고 싶어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가?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흔들리는 작은 배에 함께 탔고, 생존을 위해서 절대 그 배를
포기할 수 없는데, 배에서는 각자 맡은 일이 있다.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한 그동안의 지식과 경험, 냉철한 사고가 적절히
발휘되어야만 배는 항해를 계속 할 수 있다. 그런 경험은 모두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삶을 위협하는 상황일지라도 서로 의사소통이
잘 된다면, 그 배의 항해는 계속되어 원하는 항구에 무사히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세대 사이의 대화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배에 탄 모든
사람이 선장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너무 빨리, 어떤 사람은 너무 오랫동안 선장이 되고 싶어 하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이런 일들은 폭동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정확한 명령과 이성에 근거한 복종은, 인생이라는 험난한 바다를 헤쳐
나갈 유용한 커뮤니케이션이지만, 잔잔한 바다를 항해할 때는 명령과
복종보다는 대화가 더 좋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명심할 것은, 좋은 선장은 누구의 말이든지 경청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한 사회에서 지도층의 위치에 있는 나이인
오십이 넘으면 누구의 말이든지 경청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그 지혜를 얼마나 잘 살리느냐에 따라 사회라는 배의 항해가 결정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 인생에 활력을 준다
우리는 날로 발전하는 기술 덕분에, 운전 중에 음악을 들으면서 현재의
교통 상황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운전을
하면서도 이런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내가 조금 전에
지나왔던 구간에서 교통사고 때문에 교통 체증이 아주 심하다는 방송이
나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또 다른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죽음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따지고 보면 죽음은 항상 우리 가까이 있는데, 평상시에는 전혀 모르고 있다가,
어떤 기회가 되어서야 그것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물론 인식을 했다 하더라도
그 생각은 곧바로 사라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십대에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마지막인 죽음과 간헐적인 만남을 갖는 것이다. 참고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지식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 가지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영향력, 죽음이 우리에게 미치는 힘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우리는 더 오래 살 수 있게 되었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는
시간을 더 벌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오래 살게 됨으로써 얼마간
죽음을 의식에서 지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현명하다면
죽음을 잠시 동안 잊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죽음은 우리의 의식 속에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존재하는
죽음이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을 항상 결정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죽음이란 존재가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서 우리의 삶에
관여하고 있는지를 자주 인식하게 된다.
죽음은 아주 약한 끄덕임, 꿈속의 작은 흔들림 등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주는데, 죽음은 절대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평상시에는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조용한 죽음은 우리를 자주 혼란스럽게 만든다.
죽음이 가진 이런 형 언할 수 없는 영향력은 우리가 저지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끼친다.
나이 오십이 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죽음은 아직 멀리 있으며 단지
예감할 수 있을 뿐인데, 하지만 이삼십대나 사십대보다 더 가까이
있는 그 죽음과의 만남을 늘 생각해야만 한다.
아울러 중년의 나이에 이른 우리는,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 죽음은 확실한 존재이고,
우리가 그 확실한 존재를 인식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지금까지는 단지 관객으로서 구경하고만 있던
사람도 배우로 참여하여 죽음이란 등장인물과 인생이라는 무대를 함께
만들어가야 할 차례가 된 것이다.
나 역시 이제부터는 공연을 함께 해야만 하고, 이제까지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무대에 올라가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런데 인생으로부터 받은 이 역할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지만,
좋은 경험이 되기도 할 것이다. 오늘 나는 내 연극 대사를 어떻게,
어떤 강약을 가지고 읊조려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 내용은 내가
살아오면서 이미 외우다시피 한 것들이다. 이것은 일종의 독백이고 이야기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생에 대한 송가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배우로 남게 되고,
죽음을 조용한 관객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한 번 관객이 된 죽음이
무대 위로 올라오려면 내가 대사를 모두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무대 위로 죽음을 부르기 전까지는, 죽음으로 하여금
어떤 역할도 맡지 못하게 할 수가 있다. 물론 앞으로도 무대 자체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처한 시기, 즉 인생의 중반에 접어든 현재의 시점에서,
항상 자신이 우리 주위에 있음을 알리려고 하는 죽음을 기다릴 시간은 없다.
다른 일을 하기에도 시간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을 영원히 잊히지 않는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일은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지금 나의 행동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예술가는 어떤 것도 우연에 맡기지 않고 항상 성실한 수공업자처럼
행동한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기회다. 이렇게 행동할 때 죽음은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 될 것이다.
●누구에겐가 기억된다는 것
오십대가 되면 영원히 존재하고 싶은 욕구는 그 매력을 잃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 세대 -현재 살아 있는 경우 나이가
구십에 가까운- 를 보며, 그 나이까지 사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그런 확인을 하지 않더라도 극히 일부의 경우에만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도 이미 알 만한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영원히
살고자 하는 소망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잠시 피하는 절망적인 시도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 아니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현재의 육체를 가진 상태에서
아직도 불멸의 존재로 남고 싶어한다.
그것은 가장 강렬한 본능이며 대자연을 움직이는 법칙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의
육체는 죽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싶어한다.
어떻게 보면 인간 사회에서 진정으로 죽는다는 것은 잊히는 것인데,
인간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잊히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 현대에 맞는 방법으로, 우리를 잊히지 않는 존재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만의 독창적인 삶을 사는 것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인생이라는 작품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행한 행동들의 집합체인데,
그 집합체들 중에서 어느 특별한 하나의 업적만이 두드러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예술가들은 그들이 남겨놓는 예술작품과 같은 물리적인 결과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된다.
그런데 이런 물리적인 결과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
평화롭고 사랑과 인내심에 가득 찬 삶, 그리고 누구에게 현재 자신의
행동이 영원히 기억되어 주기를 계산하지 않고 행하는 선한 행동에
의해서도 인생은 가꾸어질 수 있고 오랫동안 기억될 수도 있다.
한편 애석하게도 오십대에 접어든 우리들의 인생은 이미 윤곽이
드러나 있는 상태다.
즉 우리는 자신의 한계는 물론 자신이 누구인지를 상당한 수준까지 알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는 ‘나의 자손들에게 나에 대한 이미지는 어떨까?’라는
물음이 생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인생을 좀 더 다듬고 마무리하는 작업이
시작되고, 일상의 의무 외에 인생이라는 작품의 거칠거칠하고 날카로운 가시가
우리 세대를 자극하게 된다.
인생이라는 작품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노력하고 끊임없이 가꾸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는 커다란 기회가 주어진다.
즉 인생은 정성을 들인 하나의 작품이라는 생각 때문에,
이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용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의무나 책임 때문에 일하는 기간이
지나고 난 후에는, 자신의 진정한 작품(인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풍부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또한 ‘의무와 책임으로 살아온 시간 이후에는 무엇을 해야 하나?’,
‘지금까지 해왔던 직업에서 얻은 어떤 성취감이 인생이라는
작품이 되어야 하나?’라는 물음이 생길 수도 있다.
답은 ‘그럴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이다. 그
런데 나는 가끔 놀랄 때가 있다.
이처럼 중요한 인생에 대한 물음에 답을 피해가려고 하거나,
자신은 아직도 그런 물음에 대해 생각할 때가 안 되었다며 은
퇴 뒤로 미루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현재의 직장 생활을 열심히,
그리고 깨끗하게 마무리 짓고 은퇴해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이미 늦은 것이 된다.
참고로 인간의 삶은 그 삶이 한 나라를 이끌어가거나 지하철역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거나에 상관없이 거대하고 세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 삶을 계획하는 데 나이 육십이 되어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전략적인
계획을 세워야 하고, 그 계획을 마지막까지 추진하는 힘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눈덩이는 일단 구르기 시작하면 스스로 커진다. 열심히 구르면 구를수록 점점
더 커진다. 구르다 보면 모서리 부분이 깨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중에 보면 구르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더 큰 눈덩이로 남는다.
인생이란 작품도 이 눈덩이와 다를 것이 없다. 깨져나가는 부분이
생기기도 하고, 너무 많이 깨져서 작품 전체가 미완성으로 남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흔적을 남기게 될 것이고, 그 사람의 의도를,
즉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했는지, 인생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리고 이 세상에 무엇을 주고 싶어 했는지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윤곽과 틀을 마련하고자 하는 사람은,
일생 동안 자신과 끊임없이 교류해야 한다. 이렇게 교류함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이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누구에겐가 기억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지금 자신의 행동에 따라 어려운 일도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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