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찜에 피로풀고 붉은 낙조속으로···전남 함평
계절은 어김이 없다. 해풍에 실려 뭍에 이른 봄. 꺾일 줄 모르던 한파가 여린 봄볕에 저만치 물러섰다. 새봄을 맞으러 간다. 고즈넉한 한옥 풍치와 입맛 돋우는 별미, 해수찜과 황홀한 낙조가 발길을 재촉하는 곳. 전남 함평이다. 함평(咸平)은 이름처럼 '두루(咸) 화평한(平) 땅'이다. 산과 바다, 강과 평야를 고루 갖춰 부족함이 없는 까닭일까. 조선 세조 때 낙향한 이안(李案)은 함평천 인근을 둘러본 후 "중국 하남성의 기산영수(箕山潁水)와 견줄 만하다"고 말했다. 그만큼 풍광 또한 아름다운 곳이 적지 않아 봄나들이를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향화도 낙조
▲ 모평마을 한옥체험
모평마을은 구면이다. 몇 해 전 둘러본 적이 있다. 고즈넉한 한옥과 돌담, 대숲과 천년 샘(안샘), 넉넉한 시골인심이 가슴에 깊이 남아 있다.
해보면에 자리한 마을은 상·하모평과 운곡마을, 산내리를 합쳐 모평권역으로 묶은 산촌이다. 마을로 들어서자 양지바른 돌담에 뿌리내린 홍매화가 반긴다. 모진 겨울을 버텨낸 홍매화는 여린 봄볕에 이내 얼굴을 붉힐 태세다.
한옥은 논두렁과 마주한 채 줄줄이 이어진다. 남도지방 고유의 모양새를 갖춘 반가(班家)의 고택이 반듯하다. 드문드문 터진 골목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세상. 돌담을 따라 눈길을 사로잡는 고택이 임천산 자락 곳곳에 안겨 있다.
모평마을 전경 임곡정
담을 맞대고 살아가는 마을은 시간을 초월한다. 천년세월을 넘어선 안샘과 산비탈에 고즈넉이 자리한 영양재, 귀령재, 김오열 가옥, 신천강씨 열녀각, 충노도생비 등이 마을의 명물. 그 옛날 윤상용이 사용했다는 정자(영양재)에 오르면 저만치 해보천이 반짝이고 군락을 이룬 느티나무, 팽나무, 왕버들과 어우러진 임곡정이 도드라진다.
모평마을의 멋은 하룻밤 묵어야 제대로 알 수 있다. 한옥을 체험할 수 있는 민박집은 모평권역운영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숙소를 포함해 모두 12채. 대문에 걸린 현판도 제각각이다. 소풍가(笑豊家)는 '웃음이 가득한 집'이라는 뜻. 방 이름도 능소화, 백일홍 등 꽃이름이다.
모평헌(牟平軒)은 105년 전 주인장의 고조부가 세운 고택이다. 바닷물에 7년 동안 담근 후 15년 동안 건조시킨 소나무로 지었단다. 바로 옆에 천년샘물 안샘이 있다. 대문에 내단 풍경소리, 솟을대문에 '희소문(喜笑門)'이라는 현판을 내건 영화황토민박집도 눈 안에 든다. 희소문은 '대문을 들어서는 모든 이들이 행복하고 웃음이 떠나지 말라'는 뜻. 후덕한 시골인심이 현판으로 전해진다. 들풀민박, 물레방아, 외가집가세, 모수원, 다기현, 계림헌 등 나름 특색을 내세운 한옥 이름이 멋스럽다.
모평마을 풍경소리 시골밥상
이 중 윤득중·김수자 부부가 운영하는 풍경소리는 주인장의 손맛과 정성이 담긴 시골밥상이 일품. 마당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이 정겹다. 무공해 전통장이 장독마다 가득하다. 이 장으로 식사를 낸다. 안주인 김수자씨(72)는 "두 노인네만 사는 집에 찾아온 여행객이 가족처럼 반갑다"며 "내 집에 오는 손님에게 밥값을 받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다양한 체험거리로 신난다. 누에체험, 물고기잡기, 천연염색, 수묵화그리기, 녹차떡케이크 만들기, 과거시험보기, 물레방아 찧기, 오디따기, 용천사 자연탐방, 갯벌체험 등은 물론 아궁이에 장작을 지펴 고구마나 감자를 구워먹는 재미를 누릴 수 있다.
▲ 나비수산 낙지물회
한옥의 풍치를 만끽한 후에는 몸보신하러 간다. '한여름 쓰러진 소도 일으켜 세운다'는 낙지가 그 주인공. 기운을 돋우는 보양식이다. 흔히 전골이나 볶음, 날로 먹는 것과 달리 물회로 먹는다. 먹는 모양새가 남다르지만 맛과 영양은 그만이다.
낙지물회는 함평읍 기각리에서 나비수산을 운영하는 김덕모·송경희 부부가 원조다. 2002년 여름, 입맛을 돋우는 먹을거리를 찾던 중 낙지물회를 생각해낸 것. 집에서만 해먹다 주변 반응이 좋아 식당 대표메뉴가 됐다.
낙지물회
낙지물회는 커다란 대접에 낙지를 잘게 잘라 넣고 오이와 적채, 고추, 깻잎, 양파, 제철 과일 등으로 버무려 나온다. 여기에 고춧가루와 마늘, 막걸리식초, 설탕, 소금 등으로 간을 맞춘 양념은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럽다.
맛의 비결은 원재료와 정성. 낙지는 무안이나 함평에서 나는 뻘낙지만 사용한다. 낙지가 잡히지 않으면 어떨까. 그날은 가게 문을 닫는다. 수입산이 판을 치는 세상에 좀처럼 보기 드문 '현상'이다.
올해는 한파와 꽃샘추위가 극성을 부려 낙지가 많이 나오지 않아 쉬는 날이 많았다는 송경희씨는 "낙지를 요리할 때 껍질을 벗겨내야 질기지 않고 끈적임 없이 담백한 맛을 낼 수 있다"며 "새콤달콤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입맛을 돋워준다"고 말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생전에 이 맛에 반했다. 노 대통령이 낙지물회를 처음 맛본 건 2008년 4월과 7월. 당시 권양숙 여사와 함께 함평을 방문했던 노 대통령은 "지금껏 안 먹어본 음식이 없는데 이런 음식도 있었냐"며 "이렇게 깔끔한 맛은 처음"이라고 감탄했단다. 가게 중앙에는 노 대통령이 친필로 쓴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 주포 해수찜
배가 부르니 노곤하다. 해수찜으로 몸을 푼다. 지난겨울 모진 한파에 혹사당한 몸을 추스르기에 더없이 좋다.
손불면 궁산리 일대는 정통 해수찜 원조마을. 해수찜은 소나무 장작으로 가열한 유황석을 쑥, 삼못초, 뱀딸기풀 등의 약초가 담긴 해수탕에 넣어 찜질한다.
유황석이 달궈지는 아궁이
뒤뜰 아궁이에서 1300도로 달궈진 유황석을 넣은 탕의 온도는 70~80도. 이 때문에 온도가 내려갈 때까지 수건에 물을 적셔 몸에 적신다. 이곳에 외지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해수찜의 효과 때문. 유황과 알칼리성분을 다량 함유한 유황석은 불에 구우면 서로 엉겨 붙을 정도. 가열된 돌은 알칼리염을 생성하고 게르마늄 용출을 도와 살균작용, 피부질환, 신경통, 당뇨예방과 치료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포해수찜
현재 해수찜을 운영하는 곳은 모두 3곳. 이중 주포해수찜은 175년 역사를 자랑한다. 3대를 이어 해수찜을 운영하는 강온웅씨는 "과거에는 물 빠진 갯벌에 둠벙(구덩이)을 파고 돌을 날라 찜질을 했다"며 "현재는 장소만 옮겼을 뿐 전통방식 그대로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수찜 후에는 피부가 매끈거린다. 함평 바닷물과 돌에 함유된 광물질이 고열에 의해 화학반응을 일으키기 때문. 효과를 오래 누리려면 찜질 후 샤워를 하지 않는 것이 요령이다.
▲ 향화도 낙조
핏빛 세상. 낙조는 보는 이의 마음을 묘하게 만든다. 왠지 모르게 가슴마저 저며 온다. 낙조는 '함평여행의 종결자'다. 행정구역상 향화도는 영광땅에 속해 있다. 함평 낙조는 흔히 돌머리해수욕장을 손꼽지만 예까지 와서 향화도를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함평군 손불면 학산리 함평항이나 영광군 염산면 옥실리 향화도선착장 인근이 낙조 포인트. 해수찜 원조마을에서 새로 난 해안도로를 따라간다. 해변에 바짝 붙어 구불구불 이어진 이 길은 한결 운치 있다.
향화도 낙조
낙조는 보는 방향에 따라 느낌이 색다르다. 향화도를 앞에 두고 뒤로 무안의 목도와 해제반도를 겹치거나 향화도 두 봉우리 사이로 떨어지는 모양새가 압권. 신이 만든 명작이다.
향화도와 목도를 어루만진 해는 벌겋게 달아오른 수줍은 얼굴로 해제반도에 몸을 감춘다. 저무는 해가 아쉬운 것일까. 배웅을 나선 백로 한 마리가 한 폭의 그림 같다.
◇여행정보
▲찾아가는 길:서울→서해안고속도로→함평IC 또는 서울→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 장성IC에서 해보면 방면
상해임시정부청사
▲주변 볼거리:신광면 함정리에 자리한 '상해임시정부청사'(061-320-3511)는 중국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청사를 고증을 거쳐 그대로 복원한 것.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 옆에 조성돼 아이들의 역사교육에 도움을 준다. 청사 뒤편에는 김철 선생의 부인이 남편의 독립운동에 방해된다며 스스로 목을 매 목숨을 끊은 '단심송'이 남아 있다. 용천사, 불갑사, 안악해수욕장, 고막천 석교, 함평향교, 예덕리 고분군 등
낙지마당 낙지철판구이
▲맛집:낙지마당(낙지철판볶음, 061-322-2419), 해월축산한우직판장(한우, 061-323-0684), 대흥식당(육회 비빔밥, 061-322-3953), 바다이야기(연포탕, 061-322-4478) 등
▲축제:'제13회 함평나비대축제'가 4월29~5월10일까지 함평엑스포공원과 함평천수변공원, 청보리밭 등지에서 열린다. '나비와 함께 행복한 세상'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올해 축제는 야외 생태체험학습장을 운영하고 함평천지 한우 브랜드 마케팅을 강화한 것이 특징. 또 호주 신체극단 '어 스(Earth)'가 나비·곤충·생태를 주제로 거리극을 펼치고 함평천 전통꽃단지 나비날리기 등의 행사를 진행한다.
▲문의:함평군청 문화관광과 (061)320-3364, 모평권역 운영위원회 (061)323-8288, 나비수산 (061)322-3385, 주포해수찜 (061)322-9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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