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 보면 그곳은 충무로였다. 어스름하게 해가 질 무렵 보도와 건물 안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형, 나 이렇게 우리 4식구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어디론가 움직이는 사람들의 흐름에 끼어들었다. 계단을 오르고, 소파 쿠션 같이 두꺼운 문을 열고, 검보라색 부드러운 감촉의 커튼 같은 것을 걷으며 들어서자, 눈앞에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청나게 커다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뿜는 후덥지근한 열기로 내 안경은 금방 김이 서려 보이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다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자리가 캄캄해지더니, 웅성웅성하던 사람들의 소리가 이내 잦아들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 속에 내 생애 첫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드림시네마(구 화양극장) 지도 보기
2009년 1월 화양극장의 내부 모습. 가로 33m. 세로 14m. 높이 8.5m에 700여 석이 있는 대형공간이다.
극장이라는 근대 건축의 소명
생활 속에 근대는 새로운 문물과 함께 찾아오지만, 도시에서 근대는 새로운 건축물과 함께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풍자화가인 구스타프 파이힐(Gustav Peichl)의 그림을 보면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양쪽으로 제도판 날개를 단 건축가가 조종하는 비행기에서 여러 모양의 건물들이 땅으로 투하되고 있다. 학교, 아파트, 공장, 연립주택 등. [건축 폭격기]란 그림제목이 말 해주 듯, 구스타프는 어디에든 가리지 않고 근대건축을 지으려는 건축가들의 굳은(?) 신념을 우스꽝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한 편으로 아마도 극장 역시 저 그림처럼 세상에 떨어진 새로운 건축물에 하나였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건물인 극장에 부여된 것은 ‘사람들을 모아 영화를 보여주어라’는 시대의 소명이었을 것이다. | |
구스타프 파이힐의 그림[건축폭격기].
우리나라에 처음 영화관이 등장한 것은 1903년이다. 당시 콜브란이 이끌던 한성전기회사가 동대문 전차차고 겸 발전소 부지 안에 영화상영시설을 갖추고 전차공사에 동원된 근로자들의 위안공연을 목적으로 지었다가 반응이 좋아 이를 상설화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한다. 저녁시간에만 상영을 했는데 매일 1,000명이 넘는 사람이 돈을 내고 관람을 하였다고 하니 그 인기는 대단했던 것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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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60년 단성사 앞 풍경.
- 2 1962년의 대한극장. 영화 벤허의 대형 간판이 눈에 띈다.
- 3 1964년 사람들로 가득찬 화양극장 관객석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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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일제시대에는 단성사, 우미관, 조선극장이 영화관의 세 주역으로 떠오른다. 1910년 고등연예관으로 세워져 5년 후 이름을 바꾼 우미관은 ‘우미관 구경 안하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이라 할 정도의 전성기를 누린다. 특히 이곳의 매점 점원으로 시작해 종로를 거머쥔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활동거점이 되기도 했다. 한편 단성사는 한국영화의 자존심을 꾸준히 지켜왔다. 연극에 영화장면을 삽입하는 연쇄극 형식으로 만든 [의리적구토(義理的仇討)]가 1919년 10월 27일, 우리나라 최초로 상영되었으며 이 날은 ’영화의 날‘로 지정되어 지금도 기념되고 있다. 단성사는 후에도 부침을 거듭하여 해방 후에는 서편제를 필두로 하는 한국영화 부흥의 중심지가 되었다. 건너편에 마주한 피카디리 극장과 퇴계로에 자리한 대한극장과 함께 대형개봉관의 전통을 이어간다. | |
대형극장의 변모와 변형
2000년 5월 21일 영화 [징기스칸]을 끝으로 필자가 처음 영화를 보았던 대한극장은 건축물로의 45년 동안의 삶을 마감했다. 대한극장의 상징이었던 70mm 대형 시네마스코프 화면, 2,000석에 가까운 커다란 하나의 공간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다음 해 대한극장은 11개의 작은 극장과 다른 공간들이 집합된 멀티플렉스로 재탄생하였다. 단성사, 피카디리, 명보극장도 시대의 흐름을 타고 헌 옷을 벗고, 새 옷과 장비로 무장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 스카라극장(수도극장 1935)은 등록문화재 지정을 앞두고 철거가 감행되어 사라지는 해프닝을 겪기도 하였다. 시대는 앞서가는 듯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기억 깊은 곳에 자리한 추억의 공간들은 하나 둘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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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화 관객석에 들어찬 의자와 가구들의 모습.
- 2 가구점이 들어선 구 성동극장의 모습. 영화 간판 대신 가게 간판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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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건물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더이상 극장으로 쓰이지 않고 남아있는 예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남영역 근처 가까이 마주보고 있는 구 성남극장과 금성극장은 전에 영화를 보러 왔던 사람들이 기억해내기 힘들 정도로 여러 가게들이 들어차 보통의 근생 빌딩처럼 서 있었다. 그중에 흥미로운 것은 황학동 중앙시장에서 발견한 구 성동극장이다. 가구점이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사무실, 고시원, 식당, 호프집 등이 나머지 공간을 나누어 점유하고 있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또는 2층 로비 그리고 관람석 일부 공간에는 마치 의자와 테이블이 사람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 더 이상 영화를 상영하지 않지만 주변의 필요에 맞게 점유되고 변형되면서 건축의 수명은 연장되고 있었다. | |
서대문 사거리 코너에 자리한 화양극장의 외관.
화양극장이 살아온 길
현재는 서대문 아트홀이자 드림 시네마로 이름이 바뀐 ‘화양극장’은 서울에 유일하게 남은 단관극장이다. 1964년 신정연휴에 임권택 감독의 [단장록]을 처음 상영하며, 10개의 대형 개봉관에서 했던 영화를 다시 보여주는 재개봉관으로 출발하였다. 객석 707석으로 당시의 대형개봉관과 비교하면 작은 규모였다. 65년에는 낙원극장, 오스카극장, 금성극장, 서울극장과 더불어 개봉관으로 승격되었다. 화양극장의 전성기는 80년대에 찾아온다. 극장주가 홍콩영화 전문 수입사인 세진영화사와의 친분으로 홍콩영화를 독점하면서, 386세대는 익히 들어보았을 [예스마담], [영웅본색], [천녀유혼], [영웅본색2] 등 굵직한 화제작들을 연이어 흥행시키게 된다. 하루 3천 명을 넘으면 만원사례가 되었던 당시에, 심야까지 하루 7회분의 표가 모두 매진되고 기다리던 관객들의 항의로 새벽 2시에 추가편성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또 [천녀유혼]이 개봉된 때에는 주연배우인 왕조현, 장국영이 직접 와 사인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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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화양극장 로비의 모습. 한 층 더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 2 하루 아침에 철거되고 사라진 스카라 극장 터.
- 3 극장 아래 자리한 여러 가게들의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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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90년대에 접어들어 홍콩영화의 인기는 사그라지고, 시내 곳곳에 멀티플렉스가 등장하면서 화양극장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98년 시사회 전용극장인 ‘드림시네마’로 이름을 바꾸어 낮에는 재개봉 영화를 상영하고, 밤에는 시사회를 열었다. 2007년 재개발 구역이 지정되면서 곧 철거될 줄 알았던 극장은 마지막 상영작으로 [더티댄싱]을 내걸었지만, 이후 몇 년의 유예기간이 생기면서 [미션]이나 [영웅본색] 같은 고전영화를 상영하며 그 삶을 이어왔다. 2009년 5월 드림시네마는 영화상영관에서 연극, 뮤지컬, 콘서트, 시사회, 기업행사 등을 개최하는 공연문화공간으로 바뀌기 위해, 객석을 707석에서 650석으로 여유 있게 배치하고, ‘서대문 아트홀’이라는 세 번째 이름을 갖게 되었다. | |
극장 아래 있는 여러 가게들. <1.극장 2.다방(비어있음) 3.복권방 4.곱창집 5.해장국집 6.족발집 7.식당 8.꽃집 9.고기집 10.다방 11.노래클럽 12.다방.>
여러 가게들의 둥지가 되다.
2009년 초 화양극장을 조사하였다. 극장의 개략적인 실측을 하고, 그 아래 있는 가게들도 가능한 인터뷰와 조사를 해 보았다. 화양극장이 급변하는 현대사 속에 서울의 유일한 단일관으로 남아있다는 관심만큼이나, 극장 아래 자리 잡은 가게들이 어떤 삶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금은 쓰지 않는 길다방은 원래 1층 대부분의 공간을 쓰고 있었음도 알 수 있었다. [영웅본색]을 상영하던 당시 극장이 있는 블록을 몇 바퀴나 돌며 기다리는 사람들의 행렬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 |
극장 아래 다양한 공간에 들어가 자리잡은 가게들의 구성도.
현재 극장 아래 공간을 삶의 둥지로 삼고 있는 가게들은 모두 10개이다. 그 중 지하층에 있는 술집이나 1층의 가게들 일부는 조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울어진 객석바닥 아래, 때로는 한 층으로 때로는 두 층으로 입체적으로 공간을 나누어 쓰거나, 앞에 조그만 가게나 출입구를 u자형으로 감싸는 모양을 가진 식당을 볼 수도 있었다. 근처에서 수십 년 장사를 한 분이 있는가 하면, 올해 가게를 낸 집이 있기도 했다. 이사를 들어오면서 이전 가게가 쓰던 인테리어를 융통성 있게 남겨두어 쓰는 경우도 보인다. 화양극장 만큼이나 이들 가게들도 세월의 우여곡절을 넘어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끝으로 화양극장이 아직도 서울 유일의 단관극장이라 말할 수 있는지는 앞으로의 쓰임을 보아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도시 속에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계속 살 길을 모색하면서 ‘극장으로서의 소명’만은 잊지 않았다는 점은, 화양극장에 대해 대견함과 우리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이지 않을까? | |
극장 객석 바닥과 1층 가게 사이에 있는 어느 다방의 내부 모습. 기울어진 구조체가 드러나고 있다.
- 글·사진 조정구 / 건축가
- 2000년 구가도시건축(http://guga.co.kr/)을 만들어 ‘우리 삶과 가까운 일상의 건축’에 주제를 두고, 도시답사와 설계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진풍경은 10년간 지속해온 답사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것이다. 대표작으로 가회동 ‘선음재’, 경주 한옥호텔 ‘라궁’ 등이 있다. 라궁으로 2007년 대한민국 목조건축대전 대상을, 2008년에는 안동군자마을회관으로 한국건축가협회 아천상을 수상했다.
실측조사 및 도면 요네다 사치코, 강동균, 박지형, 이선재, 황주현, 임하은, 한재성, 김송수
그래픽 조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