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취미생활 여행

마지막 달동네 중계동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1. 10. 18. 10:05

"학교도 다니기 전 어릴 때에요. 아버지가 생일이라고 머리맡에 축구공을 사다 놓으셨더라고요. 너무 기뻐서 당장 들고 문 밖으로 나가서 힘껏 찼어요. 데굴데굴 산동네를 굴러 내려간 공은 하수도로 쏙 들어갔고 동생하고 하수도 끝에서 온종일 공이 나오길 기다렸지만 결국 못 찾았어요." 어린 시절을 중계동 104번지에서 지낸 임상배(34)씨의 기억이다. 불암산 자락에 자리한 산동네. 어머니는 물을 길어오셨고 아버지는 마치 맥가이버처럼 집을 고치셨다. 지금은 모두 외지로 나가 살림을 차렸지만 어릴 적 그 동네는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소위 백사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중계동 104번지는 대한민국의 개발사에 그늘처럼 남아 있다. 1967년부터 정부는 개발을 이유로 강제 이주를 추진했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바로 이곳 백사마을에 마련해줬다. 당시 용산, 청계천, 안암동의 판자촌에서 살던 사람들이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주대책으로 해준 것은 30평 남짓한 천막이 전부. 그나마 분필로 넷으로 선을 그어 네 가구가 살도록 했다. 천막 한 칸을 넷으로 나눴으니 한 집에 8평 남짓. 그래서 백사마을의 집들은 8평부터 시작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사 간 집을 사들여서 합치고, 남는 땅에 집을 지으면서 이곳의 주택은 대부분 20평 남짓한 구조로 변경됐다.

중계동 지도 보기

늑대가 울던 산골동네

104번지가 처음 생길 때 이사 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박해숙 할머니(76)는 마치 즐거운 옛날 얘기를 하듯 40년 전의 추억을 꺼내 놓는다. "내 아들이 50살이니까 정확히 44년 됐지. 여기 6통에서 내가 제일 먼저 집을 지었어요. 밤에 물 뜨러 가면 '그르릉~'하면서 늑대가 뒤를 따라와요. 깜짝 놀라 뛰어 들어오면 시어머니가 남자가 치근대는 줄 알고 '언놈이 붙잡던가?' 그랬어요. 하하하. 산 속에 갑자기 사람들이 이사 왔으니 늑대가 먹을 걸 찾아 들어왔지요. 그땐 그랬어요." 박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땔감도 없어서 산에 있는 나뭇가지, 잡풀까지 모두 긁어서 땠다고 한다. 그마저도 산을 지키는 사람한테 붙잡히면 모두 두고 내려와야 했다. 용산에서 이사 왔다는 다른 할머니는 "윗목에 물이 얼고 걸레도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겨울을 보냈다"며 "연탄 한 장에 6원 50전하던 시절인데 그걸 아끼느라 방이 얼어붙었어요."라고 말했다.


워낙 산골이라 학교 가는 길도 멀고 험했다. '토끼길'이라고 부르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산을 넘으면 지금의 하계동 '연촌초등학교'가 나왔다. 거기까지 아이들은 모두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이 길은 짐승이 많아 남자고 여자고 혼자서는 다니지 못하는 길이었다. 박 할머니는 "지금이야 중계동이 학원도 많고 교통도 좋지요. 그때는 오솔길, 진흙길뿐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심지어 장마철이 되면 부모들은 난리가 났다. 줄줄이 물이 새는 집을 수리해야 했고 학교에 간 아이들이 행여 물에 떠내려 갈까봐 아이들 데리러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산골인데도 기반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서 장마철이면 물이 차는 곳이 수두룩했다.

 

  • 1 백사마을 골목길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이다일기자>
  • 2 40년 전 이야기를 해주시는 동네 할머니들. <이다일기자>

 

 

'육여사국수'를 먹어 봤어요?

방앗간 한편에 할머니들이 모였다. 겉으로 봐서는 영업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오래된 간판과 제분기가 방앗간임을 추측케 한다. 40년 전 이야기를 부탁했더니 끝없이 이어질 기세다. 그러다 뜬금없이 '육여사국수' 이야기가 나왔다. 매일 점심이면 '육여사국수'를 받으러 가는 게 일이라고 했다. "냄비 하나 들고 그거 타러 가면 국수에 노란 무 하나 얹어서 줬어요. 그걸 그 자리에서 먹을 수 있나, 집에 가져와서 김치랑 해서 애들이랑 같이 먹었지요." 당시 104번지에서는 정부에서 밀가루 국수를 해서 나눠줬는데, 이를 두고 주민들이 '육여사국수'라고 이름을 붙였다. 당시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라 육영수 여사의 성을 딴 것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아이들 입맛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똑같은 국수를 계속 먹으니 아이들이 질려했다. 한 할머니는 "국수를 계속 주니 새끼들이 안먹을라케. 그래서 그거 타다가 채반에 말려서 기름에 튀겼지. 그래서 설탕 쳐주면 잘 먹었어. 그래 살았어요."라며 먹을 것 귀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개발과 재개발로 이어진 한평생



중계동 104번지 할머니들은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우린 별거 다 겪어본 세대에요. 해방에 전쟁도 겪었지, 거기다 개발한다고 이주해서 여기로 옮겨왔고 40년을 산동네를 오르내리며 살았지요." 지금 마을에는 대부분 노인들만 남아있다. 이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릴 적 추억의 동네로 104번지를 기억하고 있다. 오랜만에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쉽게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이유가 또 있다. 개발이 되지 않아 옛날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40년 전 지어진 집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고 동네 입구 가게부터 언덕 중턱에 자리한 교회까지 옛 모습 그대로다. 어릴 적 뛰어놀던 계단도 그대로 있고 물탱크가 있던 뒷산도 등산로로 조금 정비됐을 뿐 변한 것이 없다. 다만 달라진 것은 어릴 적 커 보이던 건물과 마당이 지금은 깜짝 놀랄 만큼 작아 보인다는 것.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불리며 드라마를 비롯해 많은 매체에 노출되던 104번지도 재개발을 직면하고 있다.

 

수년 전부터 추진되던 재개발이 갖은 사연 속에서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 이곳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되던 안 되던 빨리 결정이나 났으면 좋겠어. 집을 고치지도 못하고 사니까 말이지. 나 죽기 전에 아파트 기둥 올라가는 거나 보려나 모르겠네."라고 말했다. 

 

 

가는길
지하철 4호선, 7호선 노원역, 1호선 창동역에서 1142번 버스로 갈아타고 종점까지 가면 된다. 버스 종점이 104번지 시작이며 큰 은행나무가 서 있어 찾기 쉽다. 중계동 104번지 백사마을이 사진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무분별한 촬영으로 주민들과 마찰을 빚는 경우도 있다. 주민들의 생활을 존중하며 옛 모습을 담는 노력이 필요하다. 1,200여 가구가 모여 있는 넓은 지역이므로 한 바퀴 둘러보는데 두어 시간은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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