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인의 웅숭깊은 예술혼 서린 고즈넉한 고도
[세계일보]
'사자수 내린 물에 석양이 빗길 제/ 버들꽃 날리는데 낙화암이란다./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만 불건만/ 맘 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춘원 이광수 '낙화암'). 그곳에 길이 있다. 정겨운 산길이다. 연인과 손을 잡고 걸으면 더할 나위 없는 산책길이다. 그때 여인들이 힘껏 내달린다. 가죽신 벗겨지고 버선 찢어지는 것도 모른 채 여인들은 산꼭대기까지 허위허위 올라간다. 막다른 길. 더 이상 길이 없다. 앞은 백길 낭떠러지. 새파란 물길만 혀를 내밀며 날름거린다. 이를 어쩐다. 뒤론 16세 이상 백제 남정네를 모두 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칼을 들고 쫓는다. 적국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백제 여인들은 하나둘 치마에 얼굴을 묻고 절벽에 몸을 던진다.
부여 낙화암에서 내려다본 백마강. 멀리 보이는 백마강교 너머엔 식물박물관 '백제원'과 백제문화단지가 있다. |
서울에서 2시간대, 전국 어디에서나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옛 백제의 수도 부여는 이름만 거론해도 두근거린다.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신라 고도 경주와 달리 부여는 어딘지 모르게 조용하고 고즈넉하다.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긴 백제 성왕(523∼554)의 생각대로 부여는 산수가 평화롭고 평야가 발달하여 자원이 풍부하다. 성왕은 도성 내 부소산을 자연방벽으로 삼고, 외곽 지역에 도성을 보호하는 나성(羅城)을 축조해 성을 이중으로 보호하였다. 그 옛날 도시계획을 한 듯 부여의 도로는 사통팔달이다.
궁궐의 후원으로 전쟁시에는 최후 성곽으로 이용된 부소산성과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을 품은 정림사터, 그리고 서동요 전설이 깃든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 궁남지(宮南池·사적 제135호·634년)는 정확히 일직선을 이룬다. 청주에서 떠내려왔다는 백마강 너머 부산(浮山)과 부소산, 금성산은 어깨동무를 하듯 나란히 위치해 부여를 아담하고 포근하게 감싼다.
부여 궁남지의 비경.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으로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 깃든 곳이다. |
백마강(白馬江)은 우리나라 국토의 젖줄인 4대강의 하나로 강물이 비단결 같다 하여 지어진 금강(錦江)의 부여구간 이름이다. 강수량이 줄고 오랜 세월 방치해 강폭이 좁아져 모두들 아쉬워하던 참에 '4대강 사업'으로 우렁찬 옛 모습을 회복한 몇 안 되는 성공사례다. 어디서 왔는지 오리 몇 쌍이 역사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히 헤엄치는 게 마냥 평화롭다.
낙화암으로 내려가는 부소산 길. 패망한 나라를 뒤로하고 죽음의 길로 떠난 백제 여인들의 한이 발자국으로 찍힌 곳이다. |
부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는 고찰 무량사(無量寺)다. 극락전과 5층석탑, 석등, 당간지주, 부도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더러운 무리와 어울리는 게 싫다며 물 맑고 송림 울창한 이곳에 와서 살다 떠난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도 남아있다. 글 재주 좋은 '나의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명지대 교수가 '휴휴당'(休休堂)이라는 농가를 짓고 1주일에 이틀을 머무는 곳도 부여요, 단지 10년의 시력(詩歷)으로 한국문학계에 굵고 거친 한 획을 그은 '풀'의 시인 신동엽(1930∼1969)의 생가가 있는 곳도 부여이다. 역시 시인인 그의 부인 인병선 짚풀생활사박물관장이 지은 '생가'라는 시가 빈집을 지키며 나그네 소매를 잡는다.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새삼 꾸미는 뜻이라//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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