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취미생활 여행

해질녘 노을빛 군무·금빛 갈대 은륜에 서리는 만추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2. 1. 10. 18:46

해질녘 노을빛 군무·금빛 갈대 은륜에 서리는 만추… 철새와 함께 달리는 금강 자전거길

 

 

철새와 함께 달리는 금강 자전거길은 충남 서천의 신성리 갈대밭에서 시작된다. 장수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백제의 고도 공주와 부여 등 한반도의 허리를 서럽게 흐르다 서천에서 금강하굿둑에 막혀 거대한 호수를 형성한다. 그리고 한산모시로 유명한 한산면 신성리에서 폭 200m, 길이 1㎞에 이르는 6만여 평의 갈대밭을 만나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영화 '공동경비구역(JSA)'에서 한국군 이병헌과 북한군 송강호가 처음 조우하는 장면으로 유명해진 신성리 갈대밭은 하루 중에도 느낌과 풍경이 사뭇 다르다. 아침햇살에 젖어 황금색으로 빛나는 갈대는 가슴을 황홀하게 하고, 황혼 무렵 역광에 붉게 물든 갈대밭은 사색의 장으로 변한다. 그래서 갈대는 예로부터 시의 소재로 사랑을 받아왔다.

'언젠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신경림 시인의 '갈대'를 만나려면 벤치 네댓 개가 정겨운 전망대에서 나무데크를 걸어 갈대밭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어른 키 두 배 높이의 갈대밭에는 2㎞ 길이의 산책로가 조성돼 있어 곳곳에서 산책을 즐기는 연인들의 밀어가 바람과 갈잎의 속삭임처럼 은근하다.

신성리 갈대밭에서 금강 하구의 조류생태전시관까지 이어지는 13㎞ 길이의 자전거길은 승용차 두 대가 교행할 정도로 넓은데다 비포장이라 자전거 타는 재미가 쏠쏠하다. 목화처럼 부푼 억새꽃이 하얗게 피어 있는 길섶 좌우로 호수처럼 잔잔한 금강과 추수가 끝난 들판이 펼쳐져 늦가을의 정취가 듬뿍 묻어난다.

2.5㎞ 길이의 금강둑을 일직선으로 달린 자전거길은 용산리와 죽산리 사이를 흐르는 단상천에 의해 길이 끊긴다. 그러나 최근 4대강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단상천을 가로지르는 목교가 설치됐다. 금강둑 단절구간을 이어주는 목교는 광암천 길산천 등 서너곳. 덕분에 마을을 우회하지 않고 강바람을 맞으면서 금강둑을 달릴 수 있게 됐다.

서해안고속도로 금강대교가 지나는 화양면 와초리 앞 금강은 가창오리의 휴식처. 시베리아의 혹독한 추위를 피해 10월 중순부터 충남 서산의 천수만으로 이동한 가창오리는 11월 초부터 수천 마리씩 무리를 지어 금강 하구로 날아든다. 그리고 이곳에서 겨울을 난 후 2월에 시베리아로 떠난다.

금강둑을 달리던 은빛 동그라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와초리 전망데크에서 브레이크를 잡는다. 멀리 강심을 새카맣게 수놓은 수만 마리의 가창오리들이 활주로의 전투기처럼 수시로 비행을 하기 때문이다. 까만 점으로 보이는 가창오리는 흐르는 강물에 의해 하류 쪽으로 떠내려 오면 무리의 끝에 위치한 녀석들이 맨 앞쪽으로 이동하는 자리바꿈을 해가 질 때까지 반복한다.

금강대교에서 금강하굿둑까지 이어지는 자전거길 주변의 논은 기러기와 청둥오리의 세상. 추수가 끝난 망월리 논에서 먹이를 찾던 수천 마리의 철새들은 자동차가 질주할 때마다 어지럽게 날아올라 도로를 건넌다. 그리고 호수처럼 잔잔한 금강에서 날개를 접은 채 잔뜩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V자 편대를 이룬 채 금강의 하늘을 허허롭게 날아오른다.

금강둑에서 내려와 공원으로 단장한 갈대밭을 S자로 달리던 자전거길은 금강하굿둑과 인접한 서천조류생태전시관에서 대장정을 마친다. 금강하굿둑은 21번 국도와 장항선 철도가 통과하는 금강과 서해바다의 경계. 금강에서 폭이 가장 넓은 곳으로 가창오리를 비롯해 청둥오리, 흰빰검둥오리, 흰죽지, 알락오리, 큰고니, 개리 등 온갖 겨울철새들의 보금자리로 자리 잡았다.

금강하굿둑 아래의 바다는 갈매기들의 놀이터이지만 물이 빠지면 기러기와 오리류를 비롯해 민물도요들의 낙원으로 변한다. 주둥이가 뾰족한 민물도요는 오리류에 비해 덩치는 작지만 잿빛이 도는 흰색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라 군무를 펼치는 모습이 앙증맞다.

전북 군산 망해산에서 솟은 태양이 바다와 입맞춤을 하고 금강하굿둑의 가로등이 하나 둘 불을 밝히면 와초리 앞 강심에서 휴식을 즐기던 가창오리 떼의 군무가 시작된다. 군무는 가창오리 떼가 먹이활동을 위해 서천과 군산의 들녘으로 이동하기 전에 펼치는 장엄한 의식.

수만 마리의 가창오리가 금강대교 아래 갈대섬 주변에서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작은 점이 모이고 흩어지고 다시 모이면서 만들어내는 군무는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공연. 붉은 노을을 도화지 삼아 3∼4㎞의 대열을 형성한 가창오리 떼가 전투기처럼 빠르게 날아가더니 순식간에 토네이도를 닮은 거대한 회오리 모양을 만드는 등 변신을 거듭한다.

팽이처럼 빠르게 회전하던 회오리가 부메랑으로 변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몇 초. 이어 두 무리로 갈라진 가창오리 떼가 정면으로 부딪치기도 하지만 비행의 고수답게 충돌하는 일 없이 점과 점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파고들어 다시 거대한 생명체를 만든다. 그리고 암청색으로 짙어진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먹구름처럼 하늘을 빈틈없이 까맣게 수놓았던 가창오리 군단이 금강둑 너머 서천의 논으로 사라진 순간. 신성리 갈대밭의 갈꽃과 금강둑의 억새꽃이 비로소 가창오리의 군무가 연출하는 감동과 공포에 몸을 부르르 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