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노조 '단협 백기투항'… 어떤 일 있었나
'원칙의 힘'이 '노조 관행' 멈추게 했다
경찰청장 출신 허준영 사장 취임 첫날부터 노조와 氣싸움…
"파업땐 징계·민영화 할 것" 코레일측 확고한 방침에 노조, 파업 동력 잃고 양보
지난 5월 12일 새벽, 철도노조의 파업 예고 시간을 1시간 반 앞두고 철도공사(코레일) 노사의 단체협약이 극적으로 타결됐다.
허준영 사장은 "단체협약의 불합리한 부분을 바로잡은 것"이라며 "목표치의 70% 수준을 개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조 홈페이지에는 "미흡하지만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평도 있었지만 '엄청난 양보', '치욕스러운 결과', '백기투항'이라는 주장도 적지 않게 올랐다. 2008년 7월부터 2년 가까이 끌어온 단협의 극적인 타결을 둘러싸고 어떤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취임 첫날부터 기싸움
경찰청장 출신인 허 사장과 노조는 취임 첫날부터 충돌했다. 2009년 3월 허 사장이 취임하는 날, 코레일이 있는 대전역 앞에서 노조원 100여명이 '낙하산 인사 반대'를 외치며 길을 막았다. 그는 대전역에서 세 시간 동안 갇혀 있었고 취임식도 늦어졌다. 허 사장은 "신임 사장이 오면 노조는 그런 식으로 '기죽이기'를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허 사장은 그날 밤 사태 방치의 책임을 물어 인사노무실장을 직위해제했다. 원칙에서 노조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충격요법이었다.
갱신 협상이 진행 중인 노사 간 단체협약 내용을 들여다본 허 사장은 깜짝 놀랐다. 노조의 정치활동을 보장한다는 조항이 있었고, 노조 간부 1409명은 인사 때 노조와 협의하도록 돼 있어 제대로 인사권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다른 직장은 쉬지 않는 한글날·제헌절·공사와 노조 창립기념일 등도 휴일로 정해놓는 등 불합리한 조항이 너무 많았다.
허 사장은 전체 170여개 조항 중 120개 조항을 삭제하거나 축소하는 단협 개정안을 마련했다. 노조는 당연히 "60년 노사관계 결과물인 단협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라고 강력 반발했다.
협상은 진척이 없었다. 코레일은 2009년 11월 24일 단협 해지를 통보했다. 단협 해지를 통보하면 6개월 후 단협이 효력을 상실하는데, 그럴 경우 노조 전임자 임금, 조합비 수금 등 회사 지원이 끊겨 사실상 노조 활동이 불가능하다.
이틀 후 노조는 파업으로 맞대응했다. 허 사장은 "원칙을 지키겠다"며 굽히지 않았고 노조는 역대 최장 기간인 8일간 파업을 벌였지만 별다른 소득 없이 파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파업이 끝나자 허 사장은 파업 때 공언한 대로 불법 파업 참가자 1만1000여명 전원을 징계했다.
◆노조, 파업 못하자 양보
허 사장의 '원칙'과 노조의 '관행' 주장 사이의 충돌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올 들어 코레일은 그동안 대신 내준 서울 용산구 철도노조 건물의 전기요금 대납을 중단했고, 요금이 연체되자 한전은 노조 사무실 전기를 끊었다. 노조는 "허 사장의 비이성적인 노조 탄압의 전형"이라고 비판했지만, 하루 만에 미납분을 내고 전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 ▲ 철도공사 허준영 사장과 철도노조 김정한 위원장 직무대행 등이 지난달 14일‘임금·단체협약 체결식’에서 서명한 협약서를 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노사는 이런 와중에도 단협 협상을 계속했지만 진전이 없었다. 협상 과정에서 노조는 해고자 복직을 요구했지만 코레일은 일언지하에 불가 방침을 밝혔다. 이러는 사이 단협 실효 시한인 5월 24일은 하루하루 다가왔다.
노조는 "협상 진전이 없을 경우 5월 12일 총파업에 들어가겠다"고 공언했다. 허 사장은 "노조가 파업을 강행하면 정부에 민영화 조기 추진 등을 건의하겠다"는 담화문을 발표하고 "이번에도 파업 참가자를 전원 징계하고, 징계 수위도 한 단계씩 높여 가중 처벌하겠다"고 말했다. 파업은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현장 분위기는 전과 달라져 있었다. 노조의 독려와 달리, 실제 대량 징계를 경험한 조합원들은 파업을 꺼리는 분위기가 역력했다고 코레일 관계자들은 전했다. 허 사장은 "직원들 사이에서 파업 참여를 피할 수 있는 필수유지 인력 지정을 '로또'라고 부를 정도로 참여를 꺼렸다"고 말했다.
천안함 침몰로 가라앉은 사회 분위기도 노조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결국 노조는 ▲노조의 정치활동 보장 조항 삭제 ▲인사 때 협의대상 노조 간부 189명으로 축소 ▲한글날 등 유급휴일 축소 등을 담은 단협안에 사인했다.
코레일 관계자는 "노조가 단협 해지시 파업을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조합원들의 호응이 적어 파업까지 못 갈 것 같으니 양보하는 단협에 서명한 것"이라고 말했다. 파업이 불가능하자,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허 사장이 일관되게 원칙을 지킨 결과"라며 "CEO의 확고한 의지만 있으면 불법·파행의 노사관계를 고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철도노조는 홈페이지에서 "공사가 자동승진제 삭제 조항을 전면 철회하는 등 입장변화를 보이면서 교섭의 실마리가 풀렸다"며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다음 투쟁을 기약하는 신중한 선택이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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