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이야기

퀴리 부인과 불륜을 맺은 물리학자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1. 1. 23. 12:59

 

퀴리 부인과 불륜을 맺은 물리학자

[사진 한 장에 담긴 과학자의 삶]<19>아인슈타인이 인정한 천재, 폴 랑주뱅

 

15년 전인 1996년 당시 기업체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던 기자는 우연히 수전 퀸이라는 작가가 쓴 퀴리 부인의 전기 ‘Marie Curie’(1995년 출간)에 대해 알게 됐다. 청소년시절 둘째딸 에브 퀴리가 쓴 전기만 읽었던 터라 다른 관점일 거란 생각에 영어공부도 할 겸 사봤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1906년 마차사고로 남편 피에르 퀴리가 죽은 뒤 홀로 남은 퀴리 부인이 수년 뒤 당시 프랑스 최고의 물리학자와 불륜의 관계를 맺었고 이 사실이 폭로돼 큰 고생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두 딸을 키우며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해 두 번째 노벨상(1911년 화학상)까지 받고 오늘날 불멸의 명성을 갖게 됐다고 알고 있었던 기자로서는 어안이 벙벙했다. 퀴리 부인을 사로잡은 물리학자 폴 랑주뱅(Paul Langevin)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아인슈타인도 인정한 천재

랑주뱅(왼쪽)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프랑스에 소개하는데 열심이었고 아인슈타인은 그를 천재라며 높이 평가했다. 1922년 사진으로 둘 사이의 오랜 우정이 엿보인다.

폴 랑주뱅은 139년 전인 1872년 1월 23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17세에 물리·화학에콜(현재 ESPCI)에 입학한 랑주뱅은 당시 그곳의 교수로 있던 피에르 퀴리의 애제자가 된다.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전자를 발견한 톰슨 경 밑에서 연구하기도 했고 귀국해 1902년 소르본느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지도교수도 피에르 퀴리였다. 1904년 랑주뱅은 피에르 퀴리의 뒤를 이어 물리·화학에콜의 교수가 됐다.

랑주뱅은 피에르 퀴리와 함께 상자성과 반자성에 대해 연구했다(원자속의 전자스핀으로 이 현상을 설명한 장본인이다). 피에르 퀴르가 발견한 압전효과를 이용한 초음파 연구로도 유명하다. 피에르 퀴리는 랑주뱅에 대해 “그는 현재 프랑스에서 확실히 최고의 물리학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뒤로 상대성이론도 열심히 연구했는데, 프랑스에 온 아인슈타인이 이론을 발표할 때 옆에서 보충설명을 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자신보다 7세 연상인 랑주뱅에 대해 “만일 내가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지 않았다면 랑주뱅이 발견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랑주뱅은 독립적으로 ‘E=mc2’을 유도해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과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기적의 해’로 불리는 1905년 26세의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과 광전효과에 대한 논문 외에도 브라운운동에 대한 논문도 발표했다.

브라운운동이란 물 표면에 있는 꽃가루 같은 작은 입자가 제멋대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현상이다. 아인슈타인은 물분자의 충돌이 이런 움직임의 원인이라고 가정하고 식을 만들었다.

분자를 이루는 원자가 물리적 실체임을 밝힌 그의 논문은 통계물리 분야의 기념비적인 업적임에도 그 뒤 많이 쓰이지는 않았다. 3년 뒤인 1908년 랑주뱅이 훨씬 간명하면서도 포괄적인 방식으로 브라운운동을 기술한 ‘랑주뱅 방정식’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통계물리 교과서는 랑주뱅 방정식으로 브라운운동을 서술한다.

즉 랑주뱅은 입자(꽃가루)가 받는 힘(뉴턴의 방정식 F=ma)을 유체분자(물분자)의 저항력(-λv)과 충돌하는 힘(η(t))의 합으로 봤다. 이때 유체분자가 입자에 미치는 힘(노이즈)은 확률적으로 표현된다. 최근 복잡계에 대한 연구가 붐을 이루면서 많은 논문에서 랑주뱅 방정식이 인용되고 있다. 미분방정식으로 랑주뱅 방정식을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m(d2x/dt2)=-λ(dx/dt)+η(t)

●가정의 불행 퀴리 부인에게서 위안 얻어

랑주뱅과 아내 쟌느. 결혼 4년째인 1902년 사진이다.

학문에는 뛰어난 랑주뱅이었지만 그의 가정생활은 최악이었다. 26세 때 4살 연하인 쟌느(Jeanne)라는 여인과 결혼했는데 아내 뿐 아니라 처가 식구들이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천재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아내는 끊임없이 불화를 일으켰고 마침내 시어머니와 아들을 갈라놓았다.

또 장모와 처제 역시 랑주뱅을 못살게 굴었는데, 장모가 던진 철제의자에 맞아 얼굴이 온통 상처투성이가 된 채 출근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정신적 지주였던 피에르 퀴리가 사망하자 랑주뱅은 절망했고 고질병인 위염은 더욱 악화됐다. 어느 순간부터 랑주뱅은 동료 교수이자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은 퀴리 부인에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위안을 얻게 된다.

랑주뱅 부인과도 잘 알던 사이였지만 아내가 내리친 유리병에 머리를 맞았다는 랑주뱅의 이야기를 들으며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인 프랑스 최고 천재의 불행에 안타까움이 극에 달한다.

퀴리 부인의 친구였던 앙리에트(브라운운동이론을 실험으로 증명해 1926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장 페랭의 아내)는 “마리는 랑주뱅의 경이로운 지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주위 사람들이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고 말했다.

역시 쿠리 부인의 친구인 소설가 마그리트(수학자 에밀 보렐의 아내)는 “랑주뱅이 과학에 대해, 문학에 대해, 철학에 대해 말할 때 그는 모든 걸 이해하고 있었고 모든 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의 무척이나 아름다운 갈색 눈과 얼굴 전체에서 빛이 났다”고 회상했다.

1910년 여름, 랑주뱅과 그보다 5살 연상인 퀴리 부인은 연인이 돼 있었다. 이들은 파리 근교에 자그만 아파트를 마련해 만났다. 남편 사후에 검은색 복장에 늘 침울했던 퀴리 부인이 밝은 옷을 입고 얼굴에 묘한 활력을 띤다는 걸 발견한 주위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1910년 퀴리 부인이 랑주뱅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친애하는 폴, 어제 저녁과 밤은 당신과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을 생각하며 보냈어요. 지금도 당신의 선량하고 부드러운 눈과 매력적인 미소를 떠올립니다. 당신 존재의 모든 감미로움을 다시 발견할 순간만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밀회를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과 퀴리 부인에서서 뭔가 낌새를 느낀 부인은 “두 사람이 같이 통근 기차를 타는 일이 많다”며 불평을 하다가 마침내 퀴리 부인에게 보내는 남편의 편지를 가로채는데 성공했다.

편지를 읽고 극도로 흥분한 부인은 “편지를 공개하겠다”며 남편을 협박했고 “8일안에 프랑스를 떠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며 퀴리 부인을 위협했다.

결국 이들과 친한 물리학자 장 페랭과 신문사 편집자였던 쟌느의 형부 앙리 부르조아의 중재아래 둘이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태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 쟌느의 고용인이 아파트에 몰래 들어가 퀴리 부인이 랑주뱅에게 보낸 편지를 훔쳐온다. 아내와 헤어지는 전략을 알려주는 편지 내용에 격분한 쟌느는 즉각 부르조아에게 알렸고 그는 퀴리 부인을 방문한다. 위험을 느낀 퀴리 부인은 이탈리아 제노아에서 열리는 학회 참석을 핑계삼아 보렐 부부와 함께 도피한다. 당시 마그리트의 회상이다.

“그녀는 떨리는 가냘픈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마그리트, 랑주뱅을 그 자신으로부터 구해줘야 해요. 당신이나 나는 강한 사람들이지만 그는 연약해요. 그는 이해와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한편 부부사이의 다툼 끝에 랑주뱅이 아들 둘을 데리고 가출을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들의 소식을 몰라 초조해하던 쟌느는 그해 10월 말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1회 솔베이학회에 남편과 퀴리 부인이 초청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폭발한다.

1911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1회 솔베이학회에 참석한 과학자들. 퀴리 부인은 테이블에 팔로 괴고 앉아있고 서있는 사람 오른쪽 끝이 폴 랑주뱅이다. 바로 옆에 아인슈타인이 보인다.(사진 Benjamin Couprie)


●노벨화학상 못 받을 뻔 해

결국 사건은 터졌다. 일간지 ‘르 주르날’의 기자인 페르낭 하우저는 랑주뱅의 장모를 취재하는 형식으로 랑주뱅과 퀴리 부인의 관계를 폭로하는 기사를 11월 4일자에 썼다. 그러나 워낙 부정확한 내용이 많아 다른 신문이 반박 기사를 냈고 4일 뒤 하우저가 사과하며 기사를 철회해 여파가 일단락되는 듯 했다.

이때가 마침 스웨덴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선정할 무렵이었는데 화학상 수상자로 내정된 퀴리 부인에 대한 소문이 들리자 위원회는 파리 주재 스웨덴 대사에게 진상을 문의했다. 대사는 오보라고 알렸고, 위원회는 11월 7일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업적으로 퀴리 부인을 1911년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선정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파리에서는 퀴리 부인의 편지가 신문사에 떠돌고 있었다. 누구도 선뜻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퀴리 부인에 대한 시선을 차가왔다. 노벨상 수상 소식도 이틀이 지나서야 말단 기사로 실렸을 정도다.

이런 와중에 극우 성향의 언론인이었던 구스타브 테리(랑주뱅의 대학 동창!)가 자신의 신문 ‘뢰브르’ 11월 23일자에 퀴리 부인의 편지를 공개했고 ‘단란한 프랑스 가정을 파괴한 외국 여자’인 퀴리 부인에 대한 비난이 높아졌다.

극도로 분노한 랑주뱅은 테리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3일 뒤 둘은 만났다. 반대방향으로 걷다 15m가 되는 지점에서 몸을 돌린 랑주뱅은 총구를 겨눴지만 상대가 총구를 바닥으로 향한 모습을 보고 총을 내려놓았다.

결국 결투는 총을 회수한 입회인이 하늘을 향해 발사하는 걸로 끝났다. 테리는 당시 행동에 대해 “프랑스 최고 천재를 죽인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고 썼다.

결국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스웨덴 노벨위원회는 국왕이 참석하는 시상식 자리에서 불미스런 사태가 일어날 걸 염려해 노벨상을 거절하라는 제안을 담은 편지를 퀴리 부인에게 보낸다.

충격을 받은 퀴리 부인은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상은 과학자의 사생활이 아니라 업적에 주어지는 것”이라며 시상식에 참석한다. 다행히 시상식에서는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 뒤 스캔들은 가라앉았고 랑주뱅은 아내와 별거하기로 합의했다. 물론 이 사건 이후 랑주뱅과 퀴리 부인의 로맨스도 끝이 났다. 퀴리 부인은 극도의 스트레스로 신장에 병을 얻어 쓰러졌고 그 뒤 2년 동안 고생했다. 이후 퀴리 부인에게서 다시는 삶의 활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1915년 랑주뱅은 “마리 퀴리는 여전히 나에 대한 애정과 내 슬픔에 대한 동정을 보여준다”며 “그녀의 애정없이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고 쓰고 있다.

사실 랑주뱅은 1914년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아들의 회상에 따르면 얼마 뒤 아내의 묵인아래 비서를 정부(情婦)로 삼았다고 한다. 만일 랑주뱅이 좋은 여자를 만나 이렇게 삶을 소모하지 않았다면 더 뛰어난 업적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2011년은 세계 화학의 해

두 사람의 연인관계는 끝났지만 랑주뱅가(家)과 퀴리가의 인연은 끝나지 않았다. 랑주뱅은 퀴리 부인의 첫째 딸 이렌의 박사학위 지도교수를 맡았고, 그녀의 남편 프레데리크는 1943년 랑주뱅이 나치를 피해 스위스로 탈출하는 걸 도왔다. (퀴리 부인은 1934년 사망했다.)

좌파였던 랑주뱅은 평소 반(反)나치의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이다. 그 뒤 파리가 수복돼 돌아온 랑주뱅은 1946년 74세로 사망했다.

랑주뱅과 퀴리 부인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들의 손자(미셸 랑주뱅)과 손녀(엘렌 졸리오)의 사랑은 결혼으로 결실을 맺었다고 한다. 정말 소설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다.

올해는 유엔이 정한 ‘세계 화학의 해’다. 퀴리 부인의 노벨화학상 수상 100주년을 기념해 선정했다고 한다. 만일 퀴리 부인의 편지가 좀 더 일찍 공개돼 선정위원회가 진실을 알았다면 적어도 1911년 수상자로 퀴리 부인이 선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퀴리 부인이 위원회의 제안대로 수상을 거부했다면 화학의 해가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퀴리 부인의 이미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해마다 시즌이 되면 역대 노벨상 최고의 스캔들로 후세의 입에 오르내렸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