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지붕이 물결치고 황토빛 흙돌담이 골목을 이룬 마을에 겨울 오후의 햇볕이 아늑하게 고였다. 골목길을 걸어가다가 큰 나무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옆 돌담에는 ‘목은 이색 등산로’라고 적힌 이정표가 있었다. 이정표를 따라 큰 나무 앞을 지나 숲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바람은 쉬지 않고 계속 불었고 대숲 전체가 바람에 일렁거렸다. 대숲을 지나는 바람이 수 많은 댓잎을 흔들고 지나가며 ‘서걱서걱’ ‘싸르락싸르락’ 거리는 소리를 만드는 데 온통 하늘을 덮은 새떼가 일제히 불러대는 노래 소리 같았다.
대숲을 지나자 소나무 숲이 나왔다. 마른 솔 향이 그윽하게 퍼졌다. 솔 숲 안에 목은 이색 기념관, 사진마을로 가는 길, 괴시마을로 내려가는 길 등 세 갈래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었다. 목은 이색 기념관 쪽으로 걸었다.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목은 이색 기념관은 단출하면서도 아늑해 보였다. 그곳에는 목은 이색 선생이 태어난 집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었고, 그 옆에는 오래 전 누군가 살았던 기와집 한 채와 목은 기념관이 자리를 틀었다. 목은 이색 기념관을 돌아보고 마을로 내려가는 길에 마을을 한 눈에 볼 수 있을 것 같은 언덕이 길 왼쪽에 보였다. 언덕에 올라 바라보는 마을은 아늑했다.
마을로 내려와 제일 처음 들른 집이 1805년에 지은 ‘구계댁’이다. 1910년에 한 번 중수 한 일이 있었으나 집의 역사를 보면 200년도 넘은 집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마을에는 구계댁 말고도 영양 남씨 괴시파종택, 경주댁, 주곡댁, 천전댁, 해촌고택, 대남댁, 영감댁, 영은고택 등 200~300년 된 한옥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을의 여러 집 가운데 눈에 들어오는 집이 두 채 있었는데, 하나는 영양 남씨 괴시파종택이며 또 하나는 물소와고택이었다.
물소와고택은 조선시대 좌승지로 추증된 물소와 남택만의 증손인 남유진이 세운 집이다. 남자의 생활공간인 사랑채와 여자의 생활공간 사이에 담을 만들어 남녀의 공간을 엄격하게 분리해 놓았다. 괴시파종택은 약 300년 전 남붕익 선생이 건립한 것으로서 입구(口)자 형의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됐다. 황금 싸라기 같은 오후의 햇살이 툇마루에 내려앉았다. 그곳에 앉아 바람 잦아든 겨울 오후의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따듯한 햇볕이 얼굴을 어루만지고, 채로 걸러낸 고운 밀가루 같은 햇살은 살갗을 타고 ‘간질간질’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시간을 잊은 채 300년 전 마을을 걸어 다니며 생각했다. ‘한옥마을을 걷는 일은 오래된 미래를 보는 것이다.’ 한옥을 짓고 마을을 이루어 살면 걱정도 없을 것 같았고 마음도 착해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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