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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터널’ 지나면… 탄광마을은 ‘童話의 나라’ 된다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2. 1. 10. 18:17

 

‘눈꽃터널’ 지나면… 탄광마을은 ‘童話의 나라’ 된다
폭설 내린 태백·정선 여행

 

 

# 눈꽃으로 가득한 태백산에서 만나는 일출풍경

거친 산자락의 능선을 바람처럼 내달리는 준족들이나, 경험 많은 베테랑 산꾼들이야 그럴 리 없겠지만 '눈 구경'하겠다며 여행 삼아 설산(雪山)을 찾는 이들에게 겨울산은 두려움에 가깝다. 무릎까지 눈에 푹푹 빠지거나 단단하게 얼어붙어 미끄러운 등산로도 그렇지만, 머리카락이 금세 뻣뻣하게 얼어붙는 추위와 능선을 타고 넘는 매서운 칼바람은 이런 두려움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눈 덮인 겨울산을 딱 한 번이라도 올라보았다면, 더구나 그 산이 태백산이라면 이런 두려움쯤은 단번에 떨쳐버릴 수 있으리라.

↑ 정암사 육화정사 옆에 심어진 마가목이 눈 속에서 선명한 붉은빛의 열매를 매달고 있다.

↑ 태백시 남부마을의 옛 탄광촌 마을에 그려진 벽화.

↑ 정선에서 태백을 거쳐 영월 쪽으로 내려서는 해발 1330m의 고갯길 만항재 정상 아래 낙엽송 숲에는 눈이 허벅지까지 쌓였다. 봄부터 가을까지 야생화들이 피고 지는 곳인데, 겨울에는 낙엽송 가지마다 온통 화려한 눈꽃이 피어 가장 낭만적인 설경을 보여주는 곳이다. 낙엽송 숲으로 들어선 한 여행객이 두손으로 눈을 그러모아 하늘로 던지고 있다.

태백산은 가슴이 터질 듯한 오르막도 없고, 아찔한 암봉도 없다. 산세는 웅장하지만 능선은 부드럽다. 해발 고도는 1567m에 달하지만 가장 빠른 코스를 택하면 2시간 남짓이면 정상에 가닿는다. 태백은 또 겨울의 비장미와 썩 잘 어울린다. 일찍이 환웅이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내려온 곳이 바로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다. 신과 인간이 처음 만났던 '신령의 산'이란 느낌은 태백의 온 천지가 눈으로 뒤덮여 겨울의 비장미를 뿜어낼 때 비로소 실감이 난다. 태백이 대표적인 '겨울산'으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태백산을 오르는 코스는 대략 4가지다. 문수봉이나 부쇠봉을 거쳐 돌아가면 정상까지 7시간 남짓이 걸리지만, 겨울 등산이라면 대부분 당골이나 백단사 입구, 유일사 입구를 기점으로 삼는다. 편도 거리는 대략 4㎞ 남짓.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는 눈밭 길을 걷는데도 정상까지는 2시간30분쯤이면 넉넉하다. 하산까지 합치면 도합 4시간이면 된다.

사실 눈 내린 태백산에서 산행 소요시간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나뭇가지마다 서리가 얼어붙은 상고대와 눈이 얼어붙은 설화에다 눈의 무게를 못이겨 휘어진 가지 사이로 걷다보면 오히려 그 길이 짧은 것이 못내 아쉬워질 정도이니 말이다.

겨울 태백을 찾는 이들은 대개 유일사 입구를 기점으로 택한다. 이쪽에서 오르는 게 가장 쉬운 코스라는 점도 있겠고, 등산객들의 왕래가 잦은 코스라 눈길이 잘 다져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일사까지는 길이 뚜렷해 거의 대로나 다름없다. 눈이 소리를 빨아들이는지, 사위는 고요한데 뽀드득거리는 눈 밟는 소리만 데리고 호젓하게 걷는 길이다.

본격적인 산길은 유일사부터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나무마다 피어난 눈꽃들이 화려한 풍경을 보여준다. 여기서 풍경의 수준을 가르는 것은 시간대다. 되도록 눈 내린 이튿날, 혹은 기온이 급강하한 날을 겨누고 일찌감치 등산로에 올라붙는 게 좀 더 화려하고, 좀 더 낭만적인 풍경을 만나는 요령이다. 그중에서도 새벽 서너시쯤 산행을 시작해 일출 직전에 장군봉이나 천제단쯤에 도착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늘과 맞닿은 채 굽이치는 능선에서 만나는 장엄한 일출, 그리고 아침 볕이 퍼지기 시작할 무렵의 가장 아름다운 상고대와 설화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만항재, 잘 단장된 설경을 만날 수 있는 곳

칼바람 속의 겨울 태백산행이 엄두가 나지 않거나, 힘겨운 등산보다 가볍게 설경의 정취를 즐길 생각이라면 정선에서 영월로 넘어가는 고갯길 만항재를 찾아가는 것이 정답이다. 아니 태백산을 다녀온 길이라 해도 만항재의 설경을 놓치고 돌아가는 건 아니될 말이다. 만항재는 태백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선 함백산 자락을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만항재의 해발고도는 1330m. 고갯길이란 대개 능선과 능선의 가장 낮은 목을 넘어가지만, 인근의 산들이 워낙 높은 탓에 고갯길의 고도가 웬만한 산의 정상 높이를 넘는다. 그러니 만항재에는 한번 눈이 내려 쌓이면 봄이 올 때까지 겨우내 눈이 쌓인다.

만항재의 설경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돈된 아름다움'이다. 만항재는 사실 봄부터 가을까지 피고 지는 야생화로 이름난 명소다. 그러나 겨울의 매력도 그에 못지않다. 기온이 급강하한 날 아침에 낙엽송 가지마다 서리가 얼어붙어 상고대가 만들어지면 그 풍경은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아름답다. 야생화가 피고 지던 초지는 온통 눈 이불로 덮이고 그 위로 솟은 나무들이 모조리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면 그 아름다움에 그만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다.

만항재의 눈 구경은 편안하다. 고갯길 정상의 휴게소에 차를 세워둔 채 차 안에서 설경을 즐겨도 좋겠고, 간이매점에서 인스턴트 커피 한 잔을 받아들고 눈 쌓인 숲을 오래도록 바라봐도 좋다. 만항재 아래 소공원으로 들거나 위쪽의 산책로로 들어서 순백의 눈으로 치장된 낙엽송 사이로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을 딛고 걸어보는 맛도 그만이다.

만항재를 찾았다면 이른바 '오대 적멸보궁' 중 하나로 꼽히는 정암사를 들러보자.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절집을 뜻하는 말인데 정암사에는 절집 뒤편 산자락에 세워진 수마노탑에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 눈 내린 직후의 정암사는 아예 눈으로 포위된다. 열목어가 산다는 물길을 끼고 들어선 절집에서는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온통 눈 천지다. 눈 내린 날 정암사의 명물이라면 육화정사 옆의 마가목. 가지마다 매달린 빨갛게 익은 마가목 열매는 마치 순백의 도화지에 떨어뜨린 선명한 붉은 잉크처럼 풍경에 악센트를 준다. 또 죽은 둥치에서 새 로 자라는 적멸궁 앞의 주목에 눈이 내려 덮인 모습도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 흑백의 대비, 화려한 눈꽃 뒤의 검은색 마을

태백과 정선 일원에 내리는 눈이 각별한 것은 어쩌면 흑백의 뚜렷한 대비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다시피 태백과 정선은 한때 탄부들로 북적대던 탄광마을이었다. 폐광된 광업소에는 옛 탄전의 풍경들이 마치 흘러간 유행가처럼 남아 있다.

쇠락한 탄광마을의 풍경은 아련한 추억, 혹은 슬픔의 정서를 동반한다. 그건 석탄갱도를 드나들던 탄부들의 고된 삶 때문이라기보다는, 석탄의 시대가 끝나고 디지털의 시대가 도래한 지금 문득 되돌아보는 추억 때문이리라. 쇠락하고 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랄까. 탄광마을에서 자라지 않았더라도, 탄광마을을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라도 무너져가는 탄광마을의 풍경을 보면 가슴이 저릿해진다.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태백의 철암 일대다. 철암마을은 무너지기 직전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철암시장은 쇠락하고 쓸쓸함으로 가득하다. 할머니 너덧명이 좌판에 푸성귀 따위를 펼쳐놓고 있지만, 형광등 몇 개로 간신히 어둠을 밝힌 시장은 인적조차 없다. 한때는 탄부들로 북적이며 온통 휘황했을 마을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의 풍경이랄까. 골목마다 깃들였을 탄부들의 애환은 마을을 떠도는 음울한 기운과 뒤섞여 독특한 정서를 만들어낸다.

옛 탄광마을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면 태백시 상장동 남부마을도 둘러볼 만하다. 남부마을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함태, 풍전, 정암, 동해광업소의 광부 4000여명이 거처하던 거대한 광산 사택촌이었다. 지금도 마을의 집들은 거개가 옛 광부사택촌을 리모델링해 거주하고 있다. 이 마을의 담벼락에는 탄광마을의 애환을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곳의 벽화는 단지 그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벽화 속의 탄부들은 굵은 땀을 흘리며 탄을 캐고, 도시락을 먹고, 환하게 웃고 있다. 이 중에서도 '풋'하고 웃음이 터지는 벽화가 하나 있으니 만원짜리를 물고 있는 강아지 그림이다. 탄광의 경기가 좋았던 시절,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그려낸 것이다. 골목길 초입에 숨겨져 있으니 남부마을을 찾아간다면 꼭 찾아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