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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못지 않은 강원도 바우길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0. 5. 14. 21:26

제주올레 못지 않은 강원도 바우길

 

본시 대관령에 오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일명 '대관령 등길'이라 불리는 바우길 1구간. 말 그대로 대관령 등줄기를 따라 선자령을 걷다 한 바퀴 돌아 내려오는 길이다. 자동차로 서울에서 강릉을 오갈 때마다 멀찌감치 산 능선 위로 풍력발전기들이 보이던 곳. 그곳이 선자령이라 한다. 거기가 무슨 매력이 있을까 싶었다. '풍력발전기가 있는 곳이라니 얼마나 바람이 셀까' 꺼리는 마음도 있었다. 화창한 봄날, 그냥 바닷길이나 걸었으면….

그런데 바우길 탐사대장을 맡은 이기호씨(산악인) 꼬임에 빠져 결국 대관령 오르는 길을 택하고 말았다. 바우길은 지난해부터 소설가 이순원씨 등이 앞장서 강원도에 만들고 있는 걷는 길 이름이다. 강원도가 품은 천혜의 자연을 고루 체험하면서도 자연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게끔 길이 짜여져 관심을 끌고 있다.

이날 결론부터 말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양떼목장 인근 대관령 국사성황당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출발해 1시간30분쯤 산길을 걸어올라가자 시야가 갑자기 확 트였다. 1100m급 고지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 그 광활함에 우선 놀랐고, 그곳을 메운 온기에 두 번 놀랐다. 고원 중간중간 세워진 풍력발전기는 어쩌다 한 번씩 자기가 고장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듯 천천히 몸을 놀렸고, 그때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은 감미롭기 그지없었다. 고지인 까닭에 아직 군데군데 잔설이 보이고 평원을 뒤덮고 있는 것 또한 지난해를 난 마른 풀들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땅에 가만히 손을 대니 따스한 기운이 올라왔다. 평원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노닥대는 기자를 보며 강릉에서 왔다는 중년 등산객이 한마디 한다. "5월 중순 넘으면 600만 평 평원이 온통 푸른 초지로 변하는데 그게 진짜 장관이라오. 그때 또 오시오."





ⓒ시사IN 백승기 바우길 어디서나 소나무 향 가득한 솔숲을 만날 수 있다.

선자령 정상에서는 무리를 지어 산을 찾은 등산객 10여 명을 만날 수 있었다.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60대 안팎의 남녀들이었다. 해발 1157m라지만 다들 헐떡이는 기색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대관령 등길의 시작점으로 애용되는 대관령휴게소가 해발 840m이다. 그러니까 실상은 300m 정도만 오르면 선자령 정상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소설가 이순원씨에 따르면, 이런 평이함이야말로 바우길의 매력이다. 강원도 하면 험한 지형부터 떠올리고 지레 질색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씨는 '한 가지 생각을 잡고 유유자적 걸을 수 있는 길, 가족이 함께 걸을 수 있는 길'을 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한다.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밟는 길이어도 경사가 너무 심하면 배제했다. 설사 경사길이 있더라도 그 경사가 가능한 한 짧아야 했다.

유유자적, 가족과 함께 걷기 좋은 길

내려오는 길. 새봉전망대에 섰다. 첩첩능선이 눈앞에 다가선다. 날이 좋으면 저 멀리 동해바다가 펼쳐지고, 강릉 시내와 경포호도 보일 터였다. 대관령에서 내려다보면 '꼭 손 씻으려고 떠놓은 물' 같아 보인다고 이순원씨가 묘사했던 바로 그 호수다( < 영혼은 호수로 가 잠든다 > ). 그러나 날씨가, 시계(視界)가 도와주질 않았다. 경포호를 보고 싶으면 강릉에 가야 했다. 하산해 차를 몰았다. 경포호는 바우길 5구간 '바다 호숫길'의 중간 경유지이기도 하다. 바우길은 총 10구간, 150여km로 이어져 있는데, 크게 산길과 바닷길 둘로 나뉜다.

이 중 어느 코스로 가든 소나무 향기 가득한 숲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바우길만의 자랑이라고 탐사대장 이기호씨는 말했다. 그에 따르면 바닷길을 제외한 바우길에는 소나무 숲이 70% 이상 펼쳐져 있다고 한다. 잘생긴 금강소나무, 소박한 해송 등 종류도 다양하다. 말 그대로 걸으면서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코스가 되는 셈이다. 5구간 중반 사천해변 솔밭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는 "몇 년 전 서울서 강릉으로 이사 왔는데 날마다 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 이런 길도 모르고 사는 서울 사람들은 좀 불쌍한 사람들인겨~." 염장을 질렀다. 그 양반, < 개그 콘서트 > 좀 즐겨 보시나보다.

사연을 알고 걸으면 더 흥미로운 길도 있다. 수로부인에게 붉은 철쭉을 따 주려다 목숨을 바친 노인의 전설이 깃든 헌화길(9구간),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을 앞세우고 걸으며 오죽헌에 두고 온 어머니를 그렸다는 대관령 옛길(2구간), 천주교 박해를 피해 흘러들었다가 대관령 동쪽에서 유일하게 순교했다는 '골아우 심서방'의 신심이 깃든 심스테파노길(10구간) 등이 그것이다. "나도 길을 내면서 마을 어른들로부터 심스테파노라는 순교자가 있었다는 걸 처음 들었다. 그의 이름을 붙인 길로 그에게 위안을 건네고 싶었다"라고 이순원씨는 말했다.





ⓒ시사IN 백승기 산봉우리에는 눈이 희끗희끗 남아 있되 산 아래에서는 꽃의 향연을 만날 수 있다. 왼쪽부터 괭이눈, 현호색, 노루귀.

흠이라면 바우길에는 아직 이정표가 잘 정비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제주올레 하면 떠오르는 특징적인 화살표도, 로고도, 팻말도 바우길에는 거의 없다. "강원도 특성상 길이 대부분 국유림을 지나다보니 관(官)과 협의할 일이 아직 남아 있어서다"라고 이기호씨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다고 크게 걱정할 일은 없다. 바우길 공식 홈페이지(www.baugil.org)나 인터넷 카페(cafe.daum.net/baugil)에 가면 구간별 안내 정보가 꽤 상세하게 정리돼 있다. 구글 지도를 응용한 바우길 지도 또한 활용도가 높다. 그래도 홀로 걷는 게 불안한 이라면 매주 토요일 이순원씨가 이끄는 '시범 걷기'에 동참해볼 만하다. 그때그때 날씨와 현지 사정에 따라 걷는 코스가 달라지는데, 매주 수요일쯤이면 모이는 시간과 장소를 알리는 공지글이 홈페이지에 뜬다. 4월24일 스물여덟 번째로 열린 바우길 시범 걷기 코스는 사천 둑방길(4구간)과 헌화로 산책길(9구간)이었다.

 

‘10길10색’ 봄날 바우길"

 

'대관령 등길'로 불리는 1구간은 구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휴게소 인근에서 시작해 선자령을 돌아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구간이다. 강원도 사람들이 대관령을 넘을 때 이용했던 옛길을 복원한 2구간은 1구간과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하되 국사성황당에서 갈라져 반정~옛길주막~어흘리~보광리를 잇는다. 1·2구간에는 늦으면 5월 중순까지 겨울과 봄이 공존한다. 정상부터 쌓인 눈, 녹은 눈, 질척한 눈을 차례로 밟고 내려오다보면 막바지 내리막길에서는 엘레지 괭이눈 노루귀 따위 봄에 피는 들꽃을 무더기로 만날 수 있는 게 이 길의 매력이다.

보광리 유스호스텔에서 출발해 명주군왕릉까지 이어지는 3구간, 일명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은 바우길 중 경사가 가장 험하되 잘 닦인 임도를 걸으며 쭉쭉 뻗은 소나무들의 매력을 흠뻑 맛볼 수 있는 길이다. 4구간 '사천 둑방길'은 강원도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길 풍경을 보여준다. 사천진리 해안공원에서 출발해 경포호수로 이어지는 5구간 '바다 호숫길'은 어린 자녀나 연로한 부모와도 부담없이 걸을 만한 길이다. 허균·허난설헌 유적지 등을 중심으로 솔숲 산책길이 잘 닦여져 있다.


ⓒ시사IN 백승기 5구간 바다 호숫길(맨 위), 1구간 대관령 등길(아래 왼쪽), 9구간 헌화로 산책길(아래 오른쪽)
사람과 자전거만 건널 수 있는 남항진 '솔바람 다리'에서 시작해 굴산사까지 이어지는 6구간은 강릉 시내 최대 재래시장인 중앙시장을 지난다. 7구간은 경포호와 더불어 또 하나의 석호인 풍호를 지나는데, 이곳부터 바다까지 이어지는 길에 볼 수 있는 해안사구가 유명하다. "서해안 신두리사구와는 느낌이 또 다를 것"이라고 바우길이 장담한다. 8구간은 안인항에서 출발, 그 유명한 정동진으로 이어지는 '산 우에 바닷길'이다. 바닷길과 나란히 있는 산길을 따라 걷는다. 9구간은 정동진에서 출발해 바닷가를 걷는 길이다. 중간에 헌화로가 있다. 이 계절에 가면 진달래·철쭉이 한창이라 헌화가의 전설이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마지막 10구간은 병인교난 때 순교한 심스테파노를 기리는 길이다. 명주군왕릉에서 출발해 경포대까지 이어지는데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도 충분히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