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돌아보라, 봄빛 물든 청산도
완도 청산도에 가면 세 가지가 다르다. 첫번째, 거기는 푸르다. 서울처럼 칙칙하지 않다. 하늘과 바다만 푸른 게 아니라 들도 푸르다. 두번째, 담장도 길도 밭고랑도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굽고, 휘어져 있다. 반듯반듯 자로잰 듯 나누지 않았다. 휘면 휜 대로, 굽으면 굽은 대로 돌아간다. 한번에 다볼 수 없어 묘하게 호기심을 자극한다. 들쭉날쭉하지만 보기 좋다. 정감있다. 세번째, 느리다. 과속을 단속하는 카메라가 없다. (정말 못봤다) 말 그대로 슬로시티인데 굳이 카메라를 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청산도에 간 것은 얼마전 슬로길이 일부 개통돼서다. 3년 전 제주 올레길이 유명해지자 청산도에도 걷기 좋은 길을 만들어보자는 뜻에서 길을 다듬기 시작했다. 돌담도 돌아가고, 바다도 바라보면서 가는 이 길은 모두 40㎞. 현재는 21㎞만 뚫렸는데 이르면 올해 말까지 모두 개통된다.
슬로길 1코스를 따라가봤다. 6.2㎞로 3시간 코스. 도청리 부두에서 시작된 길은 '서편제'에 나왔던 밭고랑길로 이어진다. 영화에서 주인공 가족들이 어깨에 흥이 올라 북장단에 맞춰 아리랑을 부르던 돌담을 끼고 가던 밭길이다. 밭을 나눈 돌담장 너머 마늘은 무릎 높이까지 자랐다. 파랬다. 유채밭은 4월 중순 축제행사에 맞춰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심어놓아서 꽃이 만개하지는 않았다. 유채밭 너머로 바다도 파랬다. 청산(靑山)이란 이름과 딱 어울린다.
"옛날에는 선산도(仙山島)라고도 했다네요. 아름답다는 뜻이죠.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그만큼 좋다는 뜻 아닐까요."(김송기 슬로시티 사무장)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을 지나 바윗길로 접어들면 해안 절벽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여기서 도청리 부두가 잘 보인다. 부둣가에서 보면 마을 풍광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지만 여기서 보면 마을은 양쪽 어깨에 파란 바다를 끼고 있다. 풍경만 따진다면 정말 좋은 터다. 좌로 돌아가도 바다, 우로 돌아가도 바다인 곳이 우리땅에 얼마나 될까. 그저 부럽기만 하다.
길은 절벽 허리쯤을 파고들며 돈다. 과거 여행자들은 언덕배기에 있는 세트장만 보고 돌아갔다. 그 너머에 길은 들여다볼 생각도, 호기심도 없었다. 새로 뚫렸다는 길이라서 들어갔는데 "와…!" 한다. 한모퉁이를 돌 때마다 바다도 모습을 바꾼다. 양식장도, 바위 절벽도 보인다. 물빛도 모퉁이마다 다르다. 섬들도 여럿 보였는데 안내판에는 앞에 보이는 큰 섬이 보길도라 쓰여있다. 절벽 전망대의 이름은 새땅끝. 주민 왈. "글쎄 해남만 땅끝이 아니라 여기도 따지고 보면 땅끝이지라…."
길옆에는 청산도 아니면 보기 힘든 초분이 있다. 초분은 풀무덤이다. 진짜는 아니고 축제를 위해 만든 것이다.
"옛날에 집안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뱃일 나간 아들들이 들어와야 장례를 치르죠. 그래서 풀로 임시 무덤을 쓴 겁니다. 그게 풍습이 된 거죠. 지금도 실제로 청산도 사람들은 초분을 만들어요. 한 2~3년 정도 있다가 다시 매장을 하죠."
김송기 사무장은 "4월 중순 열리는 걷기 행사 때 초막 안에 놓인 관에 누워보는 이벤트도 마련했다"고 말했다. "얼마나 할지는 모르겠지만…."
청산도 마을의 제모습을 보려면 실은 신흥리나 동촌리 상서리 마을까지 들어가봐야 한다. 슬로시티란 이름과 어울리는 마을이 바로 거기 있기 때문이다. 담장은 돌로 쌓았고, 담장 너머로 동백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목이 뚝 꺾인 붉은 동백이 검은 돌담 아래 떨어져 있다. 마을 옆으로는 계단식 논이 펼쳐져 있는데 이리 구불 저리 구불거린다. 청산도에 가면 들녘만, 마을만 바라봐도 기분좋다. 칼처럼 날카롭지 않고 모든 게 둥글둥글해서다. 창처럼 솟은 빌딩숲과 각지고 모진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마을에 오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게다가 봄빛이, 그것도 초록빛이 그렇게 환할 수 없다. 햇살이 고랑고랑 빈틈없이 떨어지는 다랭이밭에서 봄바람에 이리 저리 휩쓸리는 청보리를 보고 있으면 "여기 눌러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청산도는 논도 특이하다. 다락논이 다랭이밭뿐 아니라 다른 데서 보기 힘든 구들장논이 있다. 구들장논이란 대체 뭘까. 한 뼘의 논이라도 늘리려 했던 먼 옛날, 구들장 같은 넓은 돌판을 바닥에 깔고 논을 만들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일제 때 일본인들이 이 섬까지 와서 쌀을 공출해갔다고 한다. 1970~80년대 교과서에 청산도는 어업전진기지로 나왔다. 삼치 같은 고급어종이 많이 잡혔던 천혜의 어장이었던 것이다. 80년대 후반부터는 잡는 어업은 사양길, 기르는 어업이 주종을 이뤘다. 청산도는 양식업을 하기에도 좋아서 근해는 전복양식장이 많단다. 뭐든지 부수고 새로 짓는 여느 마을들과 달리 원형까지 훼손되지 않은 섬이니 여행자들은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다. 청산도엔 이 외에도 눈여겨볼 게 많다. 고인돌도 있고, 갯돌해변도 좋다. 주변에 섬들이 많아서인지 파도마저 와락 달려들지 않는다. 느릿하게 밀려온다. 청산도의 봄은 초록이다.
▲여행길잡이… 완도서 뱃길로 50분
*완도 여객선터미널에서 배를 탄다. 오전 8시·11시20분, 오후 2시30분·6시 등 하루 4차례 배가 뜬다. 주말에는 배편을 두차례 더 늘려 운항할 때도 있다. 50분 걸린다. 청산도에서 서둘러야 할 때가 있다. 차를 가지고 갈 경우 나올 때 선착장에서 줄을 서야 한다. 평일은 1시간 전, 주말에는 더 일찍 나와야 한다. 도착하자마자 관광안내소에서 몇 시쯤 나와야 하는지를 알아두고 떠나는 게 좋다. 배삯은 편도 7150원. 청산도에서 나올 때는 6500원이다. 차량 도선료는 싼타페 기준으로 편도 2만6500원. 완도 여객선터미널 1544-1114. 청산농협(선박운항사) (061)552-9388
*차가 없을 경우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다. 현지에서 셔틀버스를 운영한다. 셔틀버스는 주말의 경우 오전 9시와 오후 1시에 떠난다. 2시간30분 정도 가이드가 함께 타서 청산도의 명소를 안내하는 식이다. 어른 5000원, 어린이 3000원. 마을버스는 배 시간에 맞춰 운행한다. 청산버스 (061)552-8546, 청산나드리 마을버스와 개인택시 (061)552-8747, 청산택시 (061)552-8519.
*2010 '청산도 슬로우걷기 축제'가 10일부터 5월2일까지 열린다. 개막식은 17일. 슬로길 행사는 1코스에서 열린다. 부두에서 도락리~서편제세트장~화랑포~새땅끝~초분~당리갯돌밭~봄의 왈츠세트장~도청항으로 이어지는 6.2㎞ 코스. 2시간40분 걸린다. www.slowcitywando.com은 걸핏하면 트래픽 초과로 안열린다. 완도군홈페이지에서 청산면을 찾아보면 부둣가 등대모텔(061-552-8558)을 비롯한 여관과 민박집, 음식점 정보가 나온다. http://tour.wando.go.kr 완도군청 문화관광과 (061)550-5224, 관광안내소 (061)550-5152.
*우리테마투어(02-733-0882)가 청산도와 보길도를 묶는 1박2일 상품을 판다. 14만9000원. 우등버스타고 가는 보길도, 청산도, 소록도, 통영을 엮은 2박3일투어는 35만원.
봄날 청산도는 기대 이상으로 매력적이다. 어디를 가나 봄냄새가 가득하고, 샛노란 유채꽃이며 아담한 초가 그리고 이끼 낀 돌담과 싱그러운 청보리까지 발걸음을 더디게 하는 요소로 가득 차 있다. 무공해 섬 '청산도'에서 풋풋한 봄을 만끽해 보자.
슬로 길에서 맛보는 아날로그적 즐거움
↑ 청산도의 노란 유채꽃밭
전남 완도에서 남쪽으로 19㎞ 떨어진 곳에 청산도가 자리 잡고 있다. 뱃길로 50분 정도 달리면 유인도 5개와 무인도 9개 등 부속 도서로 구성된 청산도에 닿는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 섬은 산과 바다가 푸르러 예부터 '청산(靑山)'이라 불렸다.
2007년 슬로시티국제연맹은 청산도를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했다. 과거와 현대의 조화를 통해 '느리지만 멋진 삶'을 추구하는 범지구적 민간운동 '슬로시티'는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됐으며 심사 기준이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우선 인구가 5만명 이하여야 하고, 전통적 수공업과 조리법을 보전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자연 친화적 농법으로 생산한 지역 특산물이 있어야 하고, 지역 주민이 전통문화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더불어 대형마트나 패스트푸드점도 없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모두 통과하고 슬로시티에 가입된 도시는 현재 세계 16개국 120여 개. 그 행렬에 청산도가 이름을 올렸다. 슬로시티라는 명성에 걸맞게 청산도에 발을 디디면 무한 속도 경쟁을 펼치는 디지털 시대에 경험하기 힘든 아날로그적 여유를 맛볼 수 있다.
다도해 절경을 감상하며 푸른 하늘과 맞닿은 붉은 황톳길을 걷다 보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진다. 이 점에 착안해 총 6개 코스로 구성된 슬로길 1구간이 개방됐다. 1구간은 도청항~화랑포~구장리~권덕리~범바위~장기미~청계리~원동리~상서리~동촌리~항도까지 이르는 구간으로 총 19.4㎞다. 이 구간은 청산도 주민들이 산책로로 이용하던 길로 인공적인 개발 공사 없이 조성됐다. 이 때문에 원래부터 있던 길이라 해서 '원래길'이라 불리기도 한다. 말탄바위~범바위~장기미 구간만 다소 가파를 뿐 나머지 구간은 완만한 오르락내리락 길이 이어진다. 천천히 걸으면 5시간 정도 소요된다.
1코스 테마는 영상촬영지, 2코스와 3코스는 해안절경, 4코스는 청산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범바위, 5코스는 섬사람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구들장논, 6코스는 문화재로 지정된 돌담과 들국화가 테마다. 느림과 여유, 쉼의 미학이 이 길에 모두 녹아 있다.
나머지 구간 19㎞는 올해 7월 개방된다. 항도에서 신흥리해수욕장, 진산리 몽돌해수욕장, 양지돔, 국화마을, 자갈밭, 지리해수욕장, 청산중학교 등을 거쳐 도청항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구간은 단풍길, 모래밭길, 미로길 등 주제로 조성될 계획이다.
누렁소가 밭을 갈고 구들장논과 무공해 청정해변이 꿈틀거리는 아름다운 섬을 걷다 보면 소담한 마을 정취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햇살이 따사로운 봄날 청산도를 찾는다면 노란 유채꽃과 짙푸른 청보리 그리고 빨간 철쭉과 보랏빛 자운영이 장관을 이룬다.
고스란히 살아 있는 섬 특유의 전통
청산도를 많은 이들에게 알린 것이 바로 영화 '서편제'다. 청산항에서 1㎞ 정도 언덕길을 따라가면 영화 '서편제' 촬영지인 '당리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유봉 일가가 '진도아리랑'을 불렀던 영화 속 그 길이 오롯이 남아 있다.
청산도에는 섬 특유의 전통문화가 고스란히 살아 있다. 특히 구들장논이 이색적이다. 청산도는 돌이 많은 지형 특성상 물 빠짐이 심해 물이 필요한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옛날부터 경사지에 넓적한 돌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흙을 덮어 구들장논을 조성해 농사를 짓고 있다.
청산도 상서마을 돌담길은 문화재로 등록되기도 했다. 상서마을 돌담은 '강담 구조'로, 흙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돌만 이용해 담을 쌓아 올린 것이 특징이다. 상서마을은 전체가 돌담으로 형성돼 있는데, 자연석을 이용해 쌓아 올린 담장이 견고하게 축조돼 있다.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 당시 마을길을 넓히면서 일부 담장을 옮겨 쌓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원형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남해와 서해 섬 지역에서 주로 행해지던 장례 풍습인 '초분(草墳)'도 남아 있다. 시신을 바로 땅에 묻지 않고 짚을 묶은 이엉으로 덮었다가 2~3년 뒤 뼈만 추려 땅에 묻는 이중 장례 풍속 중 하나로, 아직 이곳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상품정보=느낌여행사(www.filltour.com)가 '청산도 슬로 걷기 축제 여행 무박 2일' 상품을 선보인다. 청산도 슬로 걷기를 약 4시간 30분동안 한다. 왕복교통비, 선박비, 식사 2식 포함한 요금은 8만9000원. 4월 9ㆍ10ㆍ16ㆍ17ㆍ23ㆍ24ㆍ30일, 5월 1일 출발. 광주세계광엑스포와 해남 대흥사, 해수 사우나를 체험하는 '청산도 걷기 여행 1박 2일' 상품은 14만5000원부터. '쌍계사십리 트레킹ㆍ맛 여행' 상품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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