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 첫 육군葬… 계급 아닌 戰功 따라
영웅 예우하는 나라로
'6·25 전쟁영웅' 故 김한준 예비역 대위 장례식 지금까지 육군장 13명 중 10명이 육군참모총장 출신… 계급 낮고 戰死 아니라고 그동안 제대로 예우 못받아
단상은 하얀 국화 수천 송이로 가득했다. 가운데 놓인 노병(老兵)의 영정사진을 향해 육군 장성 10여명과 장병 100여명이 거수경례를 했다. 하얀 정복을 입은 김요환 육군참모차장이 목례를 하고 조사(弔辭)를 낭독했다. "김한준 선배님… 오로지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일념으로 국가와 군을 위해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사셨던 선배님의 영전에 육군 전 장병과 더불어 삼가 머리 숙여 명복을 빌며, 최고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바칩니다."
6·25전쟁에서 마지막 승전(勝戰)을 거둬 무공훈장 중 최고 등급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고(故) 김한준(83) 예비역 대위의 장례가 1일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육군장(葬)으로 엄수됐다.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중 위관급 예비역 장교에게 육군장이 거행되는 것은 처음이다. 고 김 대위의 장남 김정혁(49)씨는 "아버님 세상 떠나시는 길에 명예를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고 김 대위는 18세 때인 1947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 6·25전쟁 발발 직후 전쟁터에서 소위로 임관해 전투를 치렀다. 특히 7사단 8연대 1중대장으로 1953년 7월 20~22일 강원 화천(당시 철원) 북방 425고지 전투에서 60㎜ 박격포로 중공군 1개 대대를 섬멸하는 전과(戰果)를 거뒀다. 이 전투는 6·25전쟁사(史)에서 마지막으로 승리한 전투로 기록됐다. 그는 '지도를 바꾼 사나이'로 불렸다. 만약 425고지를 뺏겼다면 화천댐 일대가 북한 땅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받았고, 정전 후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 6·25전쟁의 마지막 승전(勝戰)으로 기록된 강원도 화천의 425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로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고(故) 김한준(83) 예비역 대위의 영결식이 1일 국립 대전현충원에서 육군장(葬)으로 거행됐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전쟁 영웅'은 휴전 이후 점점 잊혀져 갔다. 9남매 중 장남이었던 김 대위는 전후 혼란으로 월급이 나오지 않자 생계를 위해 1956년 제대를 하고 고향인 전북 완주에 돌아와 부모 농사를 도왔다. 1974년 미원 그룹에 취직해 1993년 폐암 수술 직후 은퇴했다. 부인 양옥자(80)씨는 "남편은 제대 이후에도 군인으로 살았다"고 했다. "군대 있을 때와 똑같은 시간에 점심·저녁을 먹었어요. 폐암 수술로 생사를 오갈 때 침대에서 일어나 군대 체조를 하던 양반이죠. 나이 80이 넘어서도 천안함·연평도 사건이 났을 때 소총 들고 나가 싸우겠다고 했어요."고 김 대위의 장례가 육군장으로 치러진 데에는 최갑석(83) 예비역 소장의 노력이 있었다. 최 소장은 "6·25 때 함께 전장을 누비던 전우들이 사회에서 제대로 대우 못 받고 세상을 떠나는 게 안타까웠다"고 했다. 그는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은 1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참전용사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렀다"며 "우리나라는 그 정도는 안 되더라도 최소한의 예우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최 소장은 육군장(葬) 규정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군장은 역대 참모총장을 역임한 장성, 장교로서 육군 발전에 특별한 공적을 남기고 전사·순직한 자 또는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중 전사한 자 등으로 한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작년 김상기 육군참모총장을 직접 찾아가 "전사나 순직하지 못했다고 육군장에서 제외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육군은 회의를 거쳐 작년 10월 육군장 대상 중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중 전사한 자' 규정을 '태극무공훈장 수훈자'로 바꿨고, 이에 따라 고 김 대위의 장례는 위관급 장교로는 처음으로 육군장으로 치러졌다.이번 육군장의 장의위원장을 맡은 김상기 총장은 지난 30일 전북대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장녀 김정화(57)씨는 "아버지 같은 분들께서 살아계실 때 제대로 대접받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