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이야기

"한국인 최초 비행 장교, 일본 폭격하려고…"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2. 7. 8. 15:55

 

"한국인 최초 비행 장교, 일본 폭격하려고…"

 

김영옥 대령 찾아낸 그, 이번엔 대한민국 공군史를 바꾼다
교포 사회에 힘 주려 시작
귀감될만한 교포 발굴 중 김영옥 대령 업적 알게 돼 수백 차례 만나 기록 남겨 초등 교과서에 실려 뿌듯
'임시정부 비행대' 있었다
일본 공습에 투입하려 美서 조종사 훈련 받아 잊혀진 역사적 영웅들 젊은이들에 알리고 싶다
김영옥 대령
2011년 초등학교 교과서가 개정되면서 5학년 1학기 국어 과정에 광개토대왕,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와 나란히 고(故) 김영옥 대령(1919~2005)의 이야기가 실렸다. 재미 교포 2세인 김영옥 대령은 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의 영웅이자 전쟁고아 수백명을 구하고 돌본 인도주의자로 지난해 미국 유명 포털 사이트가 선정한 '미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 16인'에 포함될 정도로 미국에선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불과 6~7년 전만 해도 그의 업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한국에선 아예 생소한 인물이었다. 잊힐 뻔한 김영옥 대령의 이야기는 생전에 그를 수백 차례 만나 인터뷰하고 관련 사료(史料)를 찾아 정리한 재미(在美) 언론인 한우성(55)씨의 노력 덕분에 우리 교과서에 실릴 수 있었다.

박희성
한우성씨는 1987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미주 한국일보, 뉴아메리카 미디어 등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한국기자상을 비롯해 AP통신 기자상 등을 받았고 6·25 당시 양민 학살을 다룬 시리즈 기사로 퓰리처상 후보에도 올랐던 그였지만, 기자보단 우리가 잊은 교포 사회 이야기를 발굴해 조명하는 역사 저술가로 더 알려져 있다. 김영옥 대령을 비롯해 임시정부의 비행대와 '비행 장교 1호'인 박희성(1896~1937)에 대한 기록을 찾아 대한민국 공군의 역사를 새로 쓰게 만들었다. 또 일제 성노예로 동원됐던 여성들이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미국 법원에 제기한 소송에 참여해 일제의 만행을 미국 사회에 알리는 데 앞장섰고, 일본 정부가 성노예 동원에 직접 개입했음을 증명하는 사료를 찾아내기도 했다. 지난 3일 우리 공군의 기원인 임시정부 비행대에 관한 출판 준비를 위해 서울에 온 한우성씨를 만났다.

-우리에게 잊힌 해외 동포들의 역사를 찾아냈다.

"우리 해외 동포가 700만이다. 한국의 해외 동포 비율이 세계적으로 6위 안에 들어간다. 그런데 해외 동포 사회의 역사는 한국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교포 사회 규모는 크지만 현지 위상은 낮았고, 한국 사회와는 거리감이 컸다. 그 점이 안타까워 한국은 물론 교포 사회와 현지 주류 사회에 크게 기여해 한국인의 귀감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을 찾아 논픽션 일대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김영옥 대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97년이었다."

-김영옥 대령은 어떤 인물인가.

"미국에선 전설적인 전쟁 영웅이다. 김영옥 대령은 2차대전에 미군 장교로 참전해 1944년 이탈리아 로마와 피사 해방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가 이끈 대대는 전투에서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와 이탈리아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6·25가 발발하자 재입대해 야전대대장으로 활약했다. 김영옥 대령이 존경받는 것은 전쟁 영웅이라서만은 아니다. 6·25 와중에 고아원을 설립해 전쟁고아 수백명을 구했고, 미국에 돌아가서도 사회사업에 몸을 바쳤다. 2009년 LA 통합교육국은 코리아타운에 새로 개교한 공립 중학교를 그의 이름을 따 '김영옥 중학교'로 명명했다. 미국 사회에서 한인 이름을 딴 첫 번째 중학교다."

-일본군 성노예 소송에 참여해 무려 7년간 법정 투쟁을 벌였다.

"1999년 캘리포니아주가 미국 법정에서 일제 징용·성노예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나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특별법을 제정했다. 처음엔 취재를 하려고 했는데, 두고 볼 수 없어 직접 참여했다."

-소송은 결국 이기지 못했다.

"당시 한국의 국제적 위상, 미국의 정책 등을 봤을 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같은 소송을 지금 벌인다면 얘기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결과를 놓고 보면 진 싸움이었지만,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2007년 미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될 수 있었다. 소송 이후에도 일본군 성노예 강제 동원을 입증하기 위한 활동을 했다. 2007년 유럽으로 눈을 돌렸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중엔 지금의 인도네시아에 머물다 강제 연행된 네덜란드 여성 피해자도 있었다. 네덜란드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일본군 장교가 성노예 강제 동원을 지시한 내용을 담은 비밀 문서를 찾아내 우리 외교부에 전달했다.

-임시정부 비행대가 존재했다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됐나.

"김영옥 대령의 전기를 쓰며 20세기 초 재미 동포 사회를 취재하다 우연히 단서를 찾았다. 1920년대 미국에는 일본 공습을 준비하는 임시정부 비행대·비행학교가 있었다는 것이다. 90년대 중반 한국에서 이미 임시정부 비행대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 그분들의 연구가 나침반 역할을 했다. 그 연구를 바탕으로 미국의 작은 시골 마을 신문사와 박물관 등을 샅샅이 뒤지며 사료를 찾아 퍼즐게임을 하듯 맞춰나갔다. 1920년 한 언론에 소개된 임시정부 군무부 총장 노백린의 인터뷰 기사를 찾았다. 비행학교가 3·1운동의 연장선에 있으며 미국에서 조종사를 양성해 일본 공습을 준비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