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웅의 추적] 국내 좌파진영 최대 자금줄 민노총에 사옥 내주고 앞잡이 노릇?
쌍용차를 죽이려 해! 경향신문은 기관지? 왜?
‘정동 상림원’ 부동산 사업으로 재정난 가중..경향 사옥 임대한 민노총과 밀월
언제부턴가 <경향신문>이 민노총 대신 ‘쌍용차 비판’의 선봉에 나서고 있다. 일간지가 ‘시위’를 독려하고 주도한다는 비판에도 아랑곳 않고 ‘쌍용차 괴롭히기’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른파 좌파 진영지라 그런 것이라고 하지만, 의심을 떨칠 수 없다. 특히 민노총과의 관계가 그렇다.
2012년 8월 6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대한문 앞
2012년 8월 6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대한문 앞. 불법 설치된 천막 분향소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경향신문>은 당시 분양소를 찾은 이 사람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노동자들이 사는 길이 험난하지만 비정규직·정리해고 없는 세상을 이뤄서 영정 앞에 다시 바치겠다고 했다. (감옥) 안에서 생각했던 이야기들은 너무 많아 다 못했다. 노동자들이야 하루하루 삶이 저항이지 않겠느냐.”
그의 이름은 한상균. 2009년 평택 쌍용차 본사공장을 점거하고 같은 동료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일명 ‘옥쇄파업’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징역형을 살고 8월 4일 출소했다. 이날 오후 8시 대한문 천막 앞에서는 민노총이 주최한 ‘한상균 동지 석방 축하 문화제’까지 열렸다.
한 씨는 2009년 여름 77일 동안 이어졌던 평택 쌍용차 공장 불법점거 당시 ‘민노총 쌍용차 지부장’이었다. 민노총은 이 불법파업에다 일제 용어를 갖다 붙여 ‘옥쇄(玉碎)파업’이라 불렀다. 당시 쌍용차 직원 대부분은 불법폭력파업에 반대했다.
하지만 쌍용차 노조 지도부는 민노총 등 외부세력 수백여 명까지 끌어들여 파업을 마지막까지 ‘극한대립’으로 이끌었다. ‘점거 노조’ 측은 회사 동료들을 향해 철제구조물을 단 ‘지게차’로 돌진하는가 하면 굵기 3~5cm의 쇠 볼트를 무차별 쏘기도 했다. 나중에는 공장 안에 보관 중인 수십만 톤의 인화물질에 불을 붙이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이 협박 때문에 경찰특공대가 투입됐다.
점거농성 진압 후 공개된 내부는 ‘점거 노조가 죽어간다’던 좌파 언론들의 ‘생중계’ 내용과 전혀 달랐다. 파업에 참여했던 일반 노조원은 공장에서 나오는 냉각수를 받아 마셔야 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파업 지도부가 지내던 곳에는 컵라면과 생수 수십 박스가 쌓여 있었다.
이후 한상균 씨 등 불법파업을 이끌던 노조 지도부는 퇴출되고 법의 심판을 받았다. 불법파업에 참가한 이들 중 다수는 ‘정리해고’ 됐다. 남은 쌍용차 노조원들은 민노총 탈퇴를 결정했고, 이후 파업에 반대했던 대다수 노조원과 사무직, 영업사원, AS센터 직원들 모두가 쌍용차를 되살리기 위해 3년 째 노력하고 있다.
쌍용차 위기의 원인은 ‘묻지마 해외 매각’
쌍용차가 2009년 위기에 빠진 이유는 ‘묻지마 해외 매각’이다. 이 점은 좌우를 막론하고 공감하는 점이다. 2004년 盧무현 정부는 쌍용차를 중국 업체에 팔아넘겼다. 이때 쌍용차는 물론 국내 자동차 업계에서도 중국 기업의 ‘기술 빼먹기’를 우려하며 만류했다. 하지만 당시 여당과 정부는 이를 밀어붙였다.
쌍용차를 집어삼킨 中상하이차의 정체가 드러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당시 쌍용차 관계자의 이야기다.
“상하이차 관계자로 쌍용차에 파견된 임원이 무척 젊었어요. 당시 30대 중후반쯤? 우리 직원들은 처음에는 그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죠.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 직위를 더 올리라는 상하이차의 지시가 왔어요. 특별한 성과도 없는데 말이죠. 왜 그런가 물어보니 그 사람이 답하더군요.
‘아, 이번에 우리 아버지의 공산당 서열이 높아졌어요. 그러니까 저도 직위가 높아져야죠.’
그 때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 중국 기업과 공산당이 어떤 관계인지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이렇게 경영되던 ‘상하이차’는 쌍용차를 인수한 지 불과 5년 만에 ‘두 손을 들고’ 도망갔다. 그 사이 쌍용차가 만든 4WD 차량 ‘카이런’의 설계도, 기술은 모두 상하이차로 넘어갔다. 그렇게 쌍용의 기술로 만든 차가 상하이차 매출 신장의 주역이 된 ‘로위 W5’이다. 물론 상하이차는 '로열티를 지불한, 정당한 기술이전'이라고 주장했지만, 과연 누가 이런 말을 곧이 들을 것인가.
이때 盧정부에서 쌍용차를 팔아넘긴 사람들과 민노총 등 좌파 진영은 상하이차 '먹튀' 논란이 생겼을 때도 ‘가해자’인 상하이차 측 보다는 ‘피해자’인 쌍용차 임직원들과 채권단에게만 문제제기를 하고 시비를 걸었다.
이 점은 당시 노동계 안팎에서도 인정했던 문제다. 불과 3년 전이다. 이런 민노총의 이중적-위선적-도그마적 행태 때문에 쌍용차 직원들이 민노총을 탈퇴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민노총은 마치 자신들이 ‘억울한 피해자’이고 쌍용차가 ‘가해자’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민노총 시위대 선봉에 나선 <경향신문>!...자금난 때문?
민노총은 최근 ‘쌍용차 옥쇄 파업’을 하다 정리해고된 사람들이 마치 ‘살해’된 것처럼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쌍용차 지게차 사건’을 기억하는 국민들에게는 이런 선동이 먹혀들지는 미지수다.
민노총의 이런 선전-선동전이 시작되는 와중에 지난 6월부터 <경향신문>이 갑자기 선전-선동전의 선봉을 자임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지난 6월 11일, 주요 좌파 단체들에 ‘공지사항’이 전달됐다. ‘살인정권 규탄! 정리해고 철폐! 쌍용차 희생자 추모와 해고자 복직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희망버스 사법탄압에 맞서는 돌려차기’라는 긴 제목의 공지에는 ‘<경향신문> 주최’라고 명시돼 있었다.
<경향신문>이 좌파적 논조의 일간지이기는 해도 특정 정파를 위해 시위를 주최한 적은 없었기에 상당히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우파 진영에서는 다양한 분석을 내놨지만 명쾌한 설명이 되지 않았다. 논조와 성향을 이유로 일간지가 시위를 주최하기에는 위험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경향신문>의 경영난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향신문>의 부동산 사업 ‘정동 상림원’
<경향신문>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정수장학회 때문이다. 1974년 MBC와 <경향신문>, <부산일보>를 소유했던 정수장학회는 지금은 <MBC> 지분 30%와 <부산일보> 지분 100%를 갖고 있다. 서울 정동 <경향신문> 사옥 토지는 여전히 정수장학회 소유다. 때문에 <경향신문>은 매월 3,400만 원 가량의 임대료를 정수장학회에 주고 있다.
<경향신문>은 1990년 한화그룹에 매각됐다가, 1998년 임직원들이 지분을 인수하면서 독립했다. 하지만 회사를 통째로 인수하면서 이전의 부채까지 떠안았다. DJ정권과 盧정권을 거치면서 재정 형편이 좋아지리라 생각했겟지만 상황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2005년 말 기준으로 <경향신문>의 부채는 1,370억 원, ‘자본잠식’ 상태였다.
결국 <경향신문> 임직원들은 2005년 말 ‘특단의 대책’을 마련했다. 자사 땅을 개발, 부동산 분양사업을 시도한 것이다.
2005년 12월 20일 <기자협회보> 보도를 보면 당시의 상황이 나와있다. 기사 제목은 ‘경향, 정동 상림원 프로젝트 본격 시동’.
<경향신문>이 가진 서울 중구 정동 일대에 한 채당 수십억 원인 ‘실버주택’을 건축-분양, 재정난을 타개한다는 프로젝트였다. 시공사는 한솔건설, PF투자사는 조흥투신운용이었다.
<경향신문>의 ‘정동 상림원 프로젝트’는 <경향신문> 본관을 제외한 신관, 팝콘하우스, 주차장 등 주변부지 5,255㎡(1,592.5평)을 재개발해 연면적 2만9,930㎡ 규모로 7층, 9층, 13층짜리 고급 ‘노인복지주택(일명 실버타운)’ 3동을 짓는 부동산 개발이었다. 각 세대가 181~360㎡(55~120평)에 이르는 ‘초호화 노인주택’이었다.
<경향신문>은 ‘정동 상림원 프로젝트’로 600억에서 800억 원을 벌어들여 재정난을 타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노인복지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소송을 당한 것이다.
<경향신문>, 결국 ‘사기분양’ 혐의로 피소되기도
당시 노인복지법에 따르면 ‘노인용 주택’은 60세 이상인 사람만 분양받을 수 있도록 돼 있었다. 60세 미만인 사람은 ‘노인용 주택’을 분양받아도 처분하도록 강제했다. 그런데 <경향신문> 측은 이 ‘정동 상림원’을 일반인에게 분양한 것이다.
<법률신문> 2009년 9월 24일자에는 ‘입주조건 사전고지 않았다면 계약취소 사유될까’라는 기사가 게재됐다. 바로 <경향신문>의 ‘중구 정동 상림원 프로젝트’ 소송 건이었다.
<법률신문>은 “60세 이상만 입주 가능한 ‘노인복지주택’임을 분양체결 당시 미리 말해주지 않은 것이 계약취소 사유인지를 두고 법원의 판단이 엇갈렸다”고 보도했다.
당시 재판에서 중앙지법 민사22부는 “신의칙상 고지의무를 위반했으므로 분양금을 돌려줘야 한다”고 결정했다. 반면, 중앙지법 민사16부는 “분양절차를 통해 매도했으니 부당이득에 해당 안 된다”고 판결했다고 <법률신문>은 전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2부(재판장 김수천 부장판사)는 조 모(48) 씨가 (주)경향신문사를 상대로 낸 분양대금반환 청구소송(2009가합38198)에서 11일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원고가 분양계약 체결 당시 노인복지시설이라는 것을 고지 받았다면 아파트를 분양받지 않았을 것이 경험칙 상 명백하다. 아파트가 노인복지시설이라는 점은 분양계약의 중요한 사항으로서 피고는 신의성실의 원칙상 사전에 원고에게 아파트가 노인복지시설이라는 사정을 고지할 의무가 있다.
…(중략)…
현행 노인복지법에 의할 때 원고는 향후 아파트를 60세 미만의 자에게 양도 또는 임대할 수 없고 60세 미만의 자녀가 상속받더라도 아파트에 입소할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게 되는 점 등에 비춰볼 때 원고의 소유권행사에 지나친 제약이 된다. 그러나 피고는 분양계약 체결 당시 원고에게 노인복지시설임이 기재된 분양공고를 제시한 바 없고, 분양계약서나 안내책자 어디에도 이 아파트가 노인복지시설이라는 언급이 없다.피고가 게재한 아파트 신문 전면광고에는 오른쪽 하단의 말미에 녹색 수풀 사진 안에 흰색의 작고 가는 글씨로 ‘상기주택 용도는 노인복지주택입니다’라고 쉽사리 눈에 띄지 않게 인쇄돼 있었다.”
반면 서울중앙지법 민사16부(재판장 정호건 부장판사)는 60세가 안 된 정 모 씨가 경향신문을 상대로 낸 부당 이득금 반환 청구소송(2009가합22537)에서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피고가 오히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아파트 분양에 관해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분양절차를 통해 원고에게 아파트를 매도한 점 등을 보면 피고가 원고에게 아파트가 노인복지주택에 해당하는 것을 굳이 숨길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숨기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노인복지주택은 시행사와 수분양자에게 모두 경제적 이익이 커서 부적격자들이 노인복지주택을 매수하는 등 투기수단으로 이용됐었다. 이를 막기 위해 구 노인복지법을 개정하면서 처벌규정을 신설했다.”
법원의 엇갈린 판결 속에서 <경향신문>의 ‘재정난’은 더욱 심해졌다. 인터넷에서 찾은, ‘경향신문 사내 게시판’으로 보이는 글에서도 이 ‘정동 상림원 소송’이 <경향신문> 경영에 악영향을 끼친 점을 엿볼 수 있었다.
결국 재정난 타개책이었던 ‘정동 상림원 프로젝트’는 2011년까지 <경향신문>의 재정난을 더욱 가중시켰다.
구세주처럼 나타난 임차인 민노총과 親朴 황우여 의원
소송은 2011년까지 이어진다. 그 새 ‘구세주’ 같은 우호세력이 나타난다. 바로 민노총이다.
2010년 4월 민노총이 <경향신문> 사옥에 입주할 계획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어 같은 해 7월 9일 민노총은 <경향신문> 사옥 본관 13~15층과 별관 2~6층에 2년짜리 전세 계약을 맺고 입주했다. 입주식에는 백기완 씨 등 좌파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당시 민노총은 2009년 쌍용차 ‘옥쇄파업’과 관련해 경찰이 요구한 손해배상으로 서울 영등포 건물 전세금이 가압류되기 직전이었다. 이때 법원이 경찰의 가압류 신청을 기각해 아슬아슬하게 <경향신문>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11년 5월 <경향신문>에 또 희소식이 들렸다. 황우여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발의한 ‘노인복지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경향신문>의 ‘정동 상림원 소송’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황 의원이 낸 법률 개정안에는 2008년 8월 4일 이전에 승인된 ‘실버주택’에 한해 소유자 나이 제한을 폐지하는 내용이 있었다. 덕분에 같은 해 9월 말 ‘정동 상림원 소송’도 일단락됐다. <경향신문>은 이때 ‘규제 풀린 실버주택, 새 투자 상품으로 뜬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는 등 홍보에 주력했다.
하지만 ‘정동 상림원 프로젝트’의 상처는 깊었다. 2011년 9월 28일 <기자협회보>의 보도다.
“2005년 당시 조용상 사장이 추진한 정동 상림원(Palace Garden)은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 뒤뜰 상림원터에 자리 잡고 있다. 지하 3층 지상 13층 규모로 3개동 98가구로 구성된 고급 노인복지 주택으로, 분양평수는 1백91.02㎡(57.78평)~3백53.09㎡(1백6.80평)로 매매가는 12억~30억원에 달한다.
당시 조 사장은 ‘연간 100억 원이 넘는 경영 적자를 그대로 두고선 생존할 수 없다. 흑자경영의 핵심이 상림원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경향은 600억~800억 원의 수익을 올려 ‘자립경영’을 위한 사업에 재투자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2008년에 분양을 시작한 뒤 분양이 제때 이뤄지지 못하면서 계획에 다소 차질이 생겼다. 분양률이 60%가 넘어야 제반비용을 제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를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중략)…
2009~2010년 경향신문 사원들에게 상여금 0%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회사 차원에서 사원들에게 시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전세를 내놨고, 현재 10가구 이상이 상림원에서 거주 중이다. 사원들에게는 월평균 약 60만원의 관리비 가운데 일정 부분을 보전해 주고 있다. …(하략)….”
<경향신문>, 경영난 때문에 민노총과 손잡아? 설마….
2011년 9월 이후 ‘정동 상림원’ 소송은 어느 정도 해결됐다고 하나 <경향신문>에 남긴 상처는 컸다.
노인복지시설 규제가 풀리면서 5가구가 더 입주하고, 밀려있던 부동산 PF 대출금과 건설 공사비를 갚아 부채규모도 상당 부분 해소했지만 <경향신문>의 재정난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경향신문> 임직원들의 밀린 급여나 보너스 등은 원상복구되지 않고 있다.
정동 상림원이 모두 분양된 지 1년이 흐른 지금도 <경향신문>의 ‘정동 상림원’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다. 안보 커뮤니티 사이트의 한 사용자는 정동 상림원을 이렇게 평가했다.
“미국대사관을 신축하려다가 무산된 경기여고 부지나 경향신문 고급 (노인) 아파트나 다 덕수궁 후원 자리에 위치해 있다. 희한한 게 美대사관은 거국적인(?) 반대로 건축이 무산되었는데 경향신문 아파트는 건축심의까지 거뜬하게 통과했다.”
그랬다. 美대사관은 2002년 지금의 광화문 대사관 부지를 내놓는 대신 중구 정동 경기여고 부지를 달라고 우리 정부에 요구했다. 이에 좌파 진영은 “덕수궁 터에 제2의 총독부가 생기지 않게 도와 달라” “美대사관 신축부지는 가장 신성한 곳”이라고 주장하며 美대사관 부지 제공을 반대했다.
그곳에 <경향신문>이 한 채 당 최고 20억 원이 넘는 초호화 노인 주택을 지어 분양하고, 현행법을 어기며 일반인을 속여 분양한 것은 왜 비판받지 않을까.
66년 역사의 <경향신문>, 재정난 이유로 휘둘릴 텐가
이를 보며 “<경향신문>의 재정난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얼마나 급했으면 그랬겠냐”고 말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자본잠식에 임직원 급여와 보너스까지 삭감할 정도의 재정난이었으니.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60년을 지켜온 ‘원칙’을 져버린다면 그게 더 비참한 일 아닐까.
<경향신문>은 1946년 10월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창간했다. 창간부터가 ‘역사’였다. 남로당이 일으킨 ‘조선정판사 사건’으로 압수된 건물이 <경향신문> 사옥이었다. 5.16혁명 뒤인 1964년에는 민간인 이준구 씨가 주인이 됐다. 1974년 정치적 이유로 MBC와 함께 ‘헌납’돼 정수장학회 소유가 됐다가 1990년 한화그룹 계열사가 됐다. 1998년에서야 임직원 소유의 회사가 됐다.
<경향신문>의 역사를 보면 쌍용차를 떠올리게 한다. 쌍용차는 1954년 서울 마포에서 하동환 자동차 제작소에서 시작했다. 이후 동방자동차공업, 신진자동차, 동아자동차, 거화로 이름을 바꾼 적이 있다. 나중에 쌍용그룹이 인수하면서 쌍용차가 됐다. 쌍용차는 외환위기 직후 대우차에 인수됐다가 상하이차를 거쳐 인도 마힌드라 계열사가 됐다.
<경향신문>과 쌍용차의 역사에는 공통점도 있다. 임직원의 ‘주인의식’이 무척 강하다는 점이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쌍용차는 이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임직원 모두가 회사를 정상궤도에 올려놓고, 떠난 직원들을 돌아오게 만들겠다며 불철주야 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경향신문>이 최근 시위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면 이런 쌍용차를 3년 전 ‘평택 옥쇄파업 시절’로 돌려놓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지난 6월부터 <경향신문>이 ‘쌍용차 공격’에 앞장 서는 이유가 대체 뭔지 궁금하다. 혹시 한 때 도움을 준 ‘자칭 진보 진영’의 제안 때문인가.
<경향신문>이 ‘정동 상림원 프로젝트’로 막심한 손해를 입고, 그 사이 ‘누군가’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해도 66년 역사의 언론이 그 때문에 ‘독립성’과 ‘자존심’을 버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나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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