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추모인파 보고 ‘8년전엔 다 어디 갔었나’ 울었죠”
‘제2연평해전 영웅’ 故 한상국 중사 부인 김종선 씨 3일 오전 서울 용산구 용산동 전쟁기념관에는 8년 전 서해 연평도 해상에서 북한 해군의 기습 선제공격에 맞서 서해바다를 지키다 침몰했던 참수리 고속정 357호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기 평택 2함대 안보공원에 전시된 357호정 원형과 크기, 피탄흔적, 선체 굴곡까지 똑같이 제작된 ‘357호정 안보전시관’ 내부는 ‘한반도의 화약고 서해북방한계선(NLL)’, ‘전투체험실’, ‘참수리 357호 고속정과 6인의 영웅’ 등 3개의 전시실로 구성됐다. 방문객들이 제1·2연평해전과 대청해전이 발생한 배경과 전투상황, 전사자들의 면면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김태영 국방장관과 역대 해군참모총장, 참수리 357호정 승조원 및 유가족 등이 참석한 이날 개관식에 가냘픈 체구의 한 여성이 벅찬 감동과 설움이 교차하며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2002년 6월29일 결혼 8개월 만에 남편 한상국 중사를 잃고 홀몸이 된 김종선(36)씨에게 이날은 그가 8년 전부터 품었던 5가지 소원 중 하나가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김씨는 2005년 4월22일 전사자들의 기념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않는 조국이 싫다며 홀로 미국으로 떠났다가 꼭 3년 만인 2008년 4월22일 같은 날 돌아왔다. “국민에게 안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용산 전쟁기념관에 357호정 안보전시관을 조성할 것을 제안했는데 8년 만에 그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김씨는 지난해 7월부터 지난 2월까지 전쟁기념관 안내데스크에서 일하며 참수리 357호정 모형을 제작하는 전과정을 지켜봤다. 김씨가 8년 전부터 품었던 5가지 소원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제2연평해전이 발생한 뒤부터 5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당시 정부가 명명한 ‘서해교전’ 대신 ‘해전’이란 명칭으로 바꾸는 것이 첫번째였습니다. 두번째가 인양한 참수리 357호 고속정을 전쟁기념관으로 옮기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실제 모형의 안보전시관을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번째는 무공훈장 서훈의 격을 높여 제대로 예우를 갖추는 것이고, 넷째가 남편의 ‘중사→상사’ 승진문제 해결, 다섯째가 357호정 부상자 등 생존자들에 대한 예우였습니다.” 명칭 변경문제는 이명박정부가 출범한 2008년에 해결됐다. ‘교전(交戰)’이란 용어는 우발적 충돌 성격이 강하고, ‘해전(海戰)’은 적의 영해 침범을 격퇴했다는 의미로 해석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김씨는 “제가 귀국한 지 4일 만에 현 정부가 ‘제2연평해전’으로 이름을 바꿨다”면서 “전쟁기념관 내 안보전시관 설치 문제도 완결되고, 생존장병들에 대한 예우 등 명예회복도 정부가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해 3가지 현안이 모두 해결됐다”고 말했다. “몇년 전만 해도 참수리 357호정 대원 중 부상자들은 국가유공자 대우는 물론 부상자들이 의료 혜택조차 제대로 못받다가 재작년에야 부상자 2명이 의료 혜택을 받게 됐습니다. 정부가 나서서 부상자 등 생존자들을 따뜻하게 치유하고, 이들의 공로를 인정해주는 등 부상 장병들의 명예도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습니다.” 357호정 승조원 30명 중 지금은 부상자를 합쳐 18명이 6월 현충일과 기일, 1년에 2번씩 유족들과 만나고 있다고 한다. 6명의 전사자들에게 추서된 무공훈장의 격을 높이는 데 왜 그토록 집착하는지 궁금했다. “형평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죠. 제2연평해전에서 적과의 전투중 순직한 6명의 장병들은 모두 한단계 격이 낮은 무공훈장이 수여됐습니다. 천안함 순직자와 비교해도 무공훈장의 격에서 차이가 납니다. 남편은 ‘부사관’에게 주어지는 충무무공훈장 대신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화랑무공훈장을 추서받았어요. 윤영하 소령은 ‘영관급’에게 주어지는 을지무공훈장 대신 충무무공훈장이 추서됐어요. 당시 해군이 5일장을 검토했다가 3일장으로 축소됐습니다. 적의 기습공격에 맞서 영해를 지키려다 순직한 장병들에게 국가가 제대로 예우를 해주지 않는다면 그건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지요.” 하지만 지난 정부에서 잘못 정한 것이라 해도 국가가 한번 정한 무공훈장 서훈을 변경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김씨는 남편의 진급 문제가 한으로 남아있다. “남편은 적과 교전을 하다 ‘실종자’로 처리돼 7월1일자로 예정대로 중사로 승진돼야 했습니다. 당시 승진이 취소된 것은 제 남편이 유일했습니다. 정말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지난 3월26일 밤 천안함 침몰사건 당시 배가 두 동강이 난 채 해저에 가라앉아 실종 상태였던 김태석·문규석 중사는 4월1일자 상사 진급예정자로 그대로 승진했습니다. 김태석·문규석 상사는 이후 시신이 발견돼 순직이 확인되면서 1계급 추서로 모두 원사로 2계급 승진했습니다. 왜 제 남편은 똑같은 상황인데도 1계급밖에 승진 못했을까요.” 해군도 8년 만에 형평성을 고려해 한상국중사의 1계급 특진 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중이라고 한다. 정부는 이참에 재보상 심사 대상을 6·25전쟁 종전후 국가안보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사자 전체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후 정부에 가장 서운했던 점은. “정부에서 유족들이 추모행사를 제대로 못치르게 했습니다. 노무현정부 출범후 유족들이 추모행사도 제대로 못해 희생자들이 너무 안타까우니 추모행사를 크게 하자고 해군측에 제안했습니다. 이 일을 추진하던 해군측이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다며 바로 꼬리를 내리고 미안하다고 통보해왔습니다. 나라를 지키러 싸우다 희생당한 장병들을 제대로 추모하지도 못하게 하는 국가에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미국으로 떠나게 된 가장 큰 동기입니다. ” 2005년 혼자 찾은 미국은 김씨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김씨가 미국으로 간 것은 제2연평해전 이듬해인 2003년 말 미국 ‘매사추세츠주 한국전쟁기념물 건립위원회’와 맺은 인연이 계기가 됐다. “매사추세츠주 제2도시 우스터라는 도시에서 열린 한국전쟁 기념비 건립위원회 창립행사에 지금은 작고한 김성은 전 국방장관이 1만달러 성금을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형제’라 새긴 배지 1000개를 만들어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기부금 기탁자들을 새기는 벽돌에 6명의 전사자 이름을 새겨주었습니다.” 우스터라는 낯선 도시에 남편을 비롯한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질 당시 국내 시민단체는 누구 하나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을 때였다. “한국전쟁 기념비 건립위원회 위원장으로 정계 영향력이 큰 프랭크 캐롤 회장이 존 케리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와 같은 줄에 저를 앉혀 주셨습니다.” 김씨는 불법체류자 신세로 뉴욕주 퀸스에서 3년간 청소, 식당일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악착같이 살았다. 하지만 그같은 경험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김씨는 “고생스러워도 전사한 남편 등 6명의 전사자 이름을 새겨 기념해주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혼자 가서 고생은 많이 했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단련이 됐고 제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제복 입은 사람들에 대한 예우에서 미국은 우리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대하는 이웃 주민들의 태도부터 달랐습니다. 함께 자유롭게 얘기하다가도 상대방의 아들이 이라크에 파병됐다고 하면 바로 태도가 달라집니다. 마을과 작은 공원 입구마다 그곳 출신 참전 전사자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비석이 있습니다.” 유족들은 2003년 1주기 추모식때 해군에서 주관하는 추모식 대신 광화문, 동아면세점 근처 시민 150여명이 주관한 별도의 추모식에 참석했지만 2004년 2주기 추모식 때는 해군에서 주관하는 추모식 외에 외부행사에는 유족들이 참석하지 못하게 통제됐다. 김씨는 “천안함 46용사 합동추모식때 서울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시민들이 국화 한송이씩 올리며 전국적인 추모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을 보고 비록 지나간 일이긴 하지만 ‘8년전 대한민국 국민들은 다 어디 갔었나’하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동안 가장 힘들었던 점은.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일자리를 구하러 군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억울한 일도 많이 당했습니다. ‘결혼도 안 한 동거녀가 설친다’는 둥 막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일부 언론의 잘못된 보도로 상처도 많이 받았습니다. 남측이 잘못해서, 북방한계선(NLL)을 월선한 우리 어선을 보호하러 고속정이 NLL을 넘는 바람에 교전이 발생했다고 보도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 김씨는 “무엇보다 가슴 아팠던 건, 저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이었다며 “‘보상금이 적어서 그렇게 설치느냐’ ‘남편과 몇개월 살았다고 그러냐, 네 갈길 가면 되지’” 하며 별의별 욕설을 다 들어야 했습니다. 김씨가 남편과 함께 산 것은 8개월로, 혼인 신고를 결혼 6개월 만에 해 많은 오해를 낳았다. 김씨는 “천안함 사태와 비교할 때 제2연평해전 당시에는 군과 정부가 사고해역에 침몰한 357호정 인양은커녕 초기 사고해역에 구조선 등 다른 배가 아예 들어오게 하지 못하게 했다”면서 “남편을 하루라도 빨리 찾기 위해 전화를 했더니 한 군 관계자가 ‘남편 한 명 구조하기 위해 NLL에 함정을 대거 투입했다가 북한을 자극해 전쟁이라도 나면 당신이 책임지겠느냐’고 화를 내 제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군과 정부는 수색인력을 보강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김씨는 ‘남편이 이런 사람들을 지키려다 허무하게 갔는가’하는 생각에 미쳐버릴 것 같아 악에 받쳐 수면제를 털어 넣었지만 다음날 깨어났다. 김씨는 “제2연평해전 이후 8년간 제가 가진 5가지 꿈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제 인생이 변했다”고 말했다. “사실 8년 동안 많이 힘들었는데 보람도 있고 제 인생에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남들이 50년 겪었을 법한 일을 8년 만에 다 겪은 느낌입니다. 신께서는 한 인간이 감당할 만한 시련을 주신다고 했는데,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감당할 만했고, 감내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제 인생에 이보다 더한 일은 다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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