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간
신장과 살
이 귀한 것
온전히 간직하다
다 나누고 떠나셨네.
떼어준 것은 은총
나눠준 것은 기쁨
그 은총과 기쁨으로
인생 여행 고이 마치셨네.
(조호진 시인의 졸시 '김성규 장로님' 전부)
"고(故) 김성규(73·동진산업기술 명예회장) 장로(長老)님이 다섯 분에게 새 생명을 선물로 나눠주고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모두들 죽은 채로 지상을 떠나는데 장로님께선 멋지게 살아서 하늘나라로 가시는군요. 은총과 기쁨을 나눠주며 일흔 셋 인생 여행 고이 마치고 떠나는 장로님의 그 발걸음을 잘 간직하겠습니다."
생의 끝은 슬프다. 한 생애를 통해 맺어진 모든 사람과 영영 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애통했고 일가친척과 지인 등 조문객들은 그의 영면을 애도했다. 하지만 그 생의 끝은 살아온 생애처럼 아름다웠기에 그의 가족들과 조문객들은 존엄한 죽음에 경의를 표하면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불의의 사고와 뇌사 그리고 생명 나눔
|
▲ 큰아들 김진용 교수와 부인 박옥주 권사가 중환자실에 입원한 고인의 손을 잡고 애통해 하고 있다. |
|
| |
지난 3일 오후 6시30분 최종 뇌사판정이 내려짐에 따라 장기기증 코디네이터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장기이식 수혜자를 연결하기 위해서다. 장기 적출 수술은 이날 밤 9시30분 삼성의료원에서 시작됐다. 간, 신장, 각막, 피부 등에 대한 적출 수술이 끝난 시각은 4일 새벽 3시께.
적출된 두 개의 신장은 삼성의료원에서 50세와 57세 남성에게 곧 바로 이식됐고, 대구가톨릭대학병원으로 긴급 수송된 간은 53세 여성에게 이식됐다. 두 개의 안구는 적임자가 나타나는 대로 각막이식 수술을 진행하고 적출된 피부는 화상환자에게 이식될 예정이다.
고인은 회사 임원 연수 모임에 격려차 참석했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지난달 26일 오후 5시30분께 전남 보성의 한 골프장 계단에서 실족하면서 머리를 크게 다친(외상성 뇌출혈) 고인은 전남대병원으로 옮겨져 수술 받은 뒤 삼성의료원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나 끝내 소생하지 못한 채 뇌사상태에 빠졌다.
"사회지도층의 의무를 일깨운 아름다운 사건"
|
▲ 박옥주 권사(71·반포침례교회)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남편 김성규 장로를 안고 애통해하고 있다. |
|
| |
죽음을 예견했던 걸까?
고인은 지난 4월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를 통해 뇌사 시 장기기증과 사후 각막기증 서약을 했다. 아내 박옥주(71·반포침례교회) 권사는 15년 전 이 단체를 통해 사후 각막기증을 했지만 당시의 고인은 반대했다. 고인이 장기기증 서약을 한 사실은 통장에서 이 단체에 대한 후원금이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 알게 됐다.
지난달 26일부터 뇌사상태가 시작됐다. 99.9% 뇌사인 가운데 0.1%의 미세한 파동(뇌파)이 있었다. 큰아들 김진용(41·삼성서울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아버지가 전혀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0.1%의 파동은 일말의 소생 가능성이 아니라 심장의 자동 박동에 의한 진동이란 의료진의 판단이었지만 장기기증 과정에서 진통이 있었다.
박 권사와 김 교수는 고인의 뜻에 따라 장기기증을 결심했다. 하지만 애절한 반대에 부딪쳤다. 아버지를 애틋해하던 외동딸 김진경(45·서울신학대학 선교영어과) 교수는 "아버지가 곧 일어날 것 같은데, 산소호흡기 소리가 코고는 소리 같은데 어떻게 호흡기를 떼어낼 수 있냐"며 반대했다. 이 가운데 고인이 큰아들과 큰며느리의 꿈에 나타났다.
김 교수는 "아버지께서 토요일(8월 1일) 제 꿈에 나타나셔서 '너 뭐하고 있느냐!'면서 육신의 장막에 미련 두고 있는 것을 질타하셨다"고 밝혔다. 이어 "다음날 제 아내(이주영)의 꿈을 아버지가 나타나 '6명에게 새 생명을 나눠주고 떠나겠다!'고 말씀한"것을 가족에 알렸다. 이런 가운데 2일 밤 혈압이 급 저하되는 등 고인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상황이 긴박해졌다.
장기기증을 반대하던 김진경 교수도 막바지엔 동의했다. 김 교수는 "아버지가 곧 일어날 것 같아서 호흡기를 떼어내는 데 동의하기 어려웠다"면서 "평소 이웃을 섬기고 베풀며 살아오신 것처럼 생명을 베푸시면서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떠난 아버지에게 감사드린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 결정에 통해 다섯 환자의 생명을 살리고 여럿 화상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게 됐다.
장기기증을 서약한 사람 가운데 약속을 이행하는 사람은 극히 미미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故) 최요삼 선수와 김수환 추기경 등 유명인사의 장기기증이 알려지면 장기기증이 쇄도하지만 장기기증을 실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이다. 장기기증 의사를 밝혔다 해도 이식이 다 가능한 것은 아니다. 특히 뇌사자 가운데 건강한 장기를 보유한 경우가 많지 않아 장기 적출은 20%이하로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뇌사 시엔 신장, 간, 폐, 심장, 췌장 등의 장기기증이 가능하지만 심장사망 시엔 각막만이 기증 가능하다. 이들 가족의 신속한 결정이 아니었으면 각막 기증에 그쳤을 수도 있었다. 의료진들은 고령자 임에도 장기이식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고인이 평소에 건강관리를 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최승주(53)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전 사무국장은 "의사 가족이 뇌사 시 장기기증을 했다는 것에 매우 큰 의미가 있다"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의무) 실천이 매우 희귀한 우리 사회에서 고인의 장기기증 서약에 이어 가족의 실천은 이웃 생명을 살린 고귀한 일이자 사회지도층의 사회적 의무를 일깨우는 아름다운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박사 15명 키운 인재 사랑...'뿌린 씨앗 썩지 않을 것'
|
▲ 성남영생원에서 화장된 고인이 장지인 공원묘지로 운구 되는 가운데 유골을 안은 큰아들 김진용(세 번째) 교수가 아버지 떠나신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있다. |
|
| |
지난 4일 20~30대 청년 8명이 빈소에 나타났다. 이들은 고인의 장학금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거나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이었다. 고인은 선한 일을 묵묵히 하는 성격이어서 가족들은 장학 사업에 대해 상세히 알지 못했기에 청년들이 누군지 몰랐다. 대구사범 4회 졸업생인 고인은 포항 구룡포초등학교에서 1년간 교사생활을 한 교육자 출신의 기업가이다.
고인은 96년 성균관대학교 이사로 참여하면서 R&D(신제품·신기술 연구개발) 연구를 위해 입실수도(入室修道, 연구실에서 먹고 자며 연구에 몰두)하는 권철신(65·성균관대 시스템경영공학과) 교수를 만났다. 권 교수는 국내에서 유일한 'R&D공학' 전문가로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악전고투하며 걷고 있었다.
고인은 권 교수의 연구와 인재양성에 3억원을 지정 기탁했다. 고인은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고 결정하면 자신의 상황을 크게 따지지 않고 도왔다고 가족들은 입을 모았다. 부채가 있는 상황에서도 인재양성을 실천한 고인의 장학 사업에 의해 8명의 박사가 탄생했고, 7명은 박사 취득을 위해 공부 중이다.
권 교수는 "6~7년은 공부해야 박사가 될 수 있는데 학비마련 등의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학생들이 기업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도중하차 하곤 했다"면서 "어려운 길을 간다며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밥을 사준 사람들은 여럿 있었지만 장학기금을 조성해 인재를 육성해준 분은 고인뿐이었다"고 밝혔다.
권 교수는 또한 "고인의 도움으로 박사가 된 제자들이 훌륭한 연구개발로 사회에 보답할 것이며, 고인이 뿌린 씨앗은 결코 썩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의 부귀영화와 상관없이 사회와 국가의 발전을 위해 인재양성을 한 고인은 꿈꾸는 분이었고, 미래를 추구한 분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할아버지의 빈자리가 슬플 거예요!
|
▲ 3남3여의 장남이자, 2남1여의 가장인 고인은 이 세상을 사랑했고, 마지막까지도 더 이상 사람을 돕지 못한 것을 자책했다. 가족들은 가장을 잃은 슬픔에 애통해 했지만 고인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받들 것이다. |
|
| |
"아버님은 손해보고 불편하더라도 자신보다 더 절실한 사람을 돕는 데 주저하지 않는 삶을 가족들에게 보여주셨기에 장기기증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의사가 되자 사회와 교회에 봉사하며 살 것을 강조하면서 받은 은혜를 이웃과 나누는 의사가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다. 김진용 교수는 대학시절엔 농촌 진료봉사를 떠났고 고대구로병원에서 내과전문의 시절엔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 자원봉사의사로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인술을 폈다. 그리고 1998년부터 2000년까지 3년간은 외교부 산하 국제협력단(KOICA) 의사로 몽골에 파견돼 환자를 돌보는 등 예수와 부친의 가르침에 충직했다.
고인은 운명을 앞두고 두 사건을 통해 크게 통곡했다. 한 차례는 영화 <쉰들러리스트>를 보면서 세상 사람을 더 돕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크게 우셨다. 또 한 차례는 김진용 교수가 권한 <그 청년 바보의사>를 읽고 세 번 크게 통곡하신 뒤 식사조차 걸렀고, 그 바보의사가 묻힌 동작동 국립묘지를 두 번이나 찾아갔다. 이 책의 주인공 고(故) 안수현씨는 김 교수의 의사 후배로 헌신적인 봉사의 삶을 살다 서른셋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고인은 성공한 기업가는 아니다. 김진용 교수는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재도구에 차압 딱지가 여러 번 붙었었다"고 회상했고, 박옥주 권사는 "의대에 진학한 큰애(김진용 교수)는 자기 공부가 힘든데도 학비를 벌기 위해 과외를 해야 했다"고 어려운 시절을 되짚었다.
역경을 이겨낸 가장 큰 힘은 가족애였다. 김진경 교수는 "아버지의 실패를 통해 우리 형제들은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개척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부에 몰두했다"면서 "아버진 여러 번의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았고, 끊임없는 칭찬과 사랑으로 자식을 돌보면서 가족을 지켰다"고 말했다.
고인은 물려줄 유산이 별로 없다. 하지만 이웃사랑의 헌신적인 삶이 결국 큰아들과 둘째아들(김진삼·서울아산병원 정형외과)을 의대교수로 키웠고, 외동딸은 신학대 교수가 됐다. 고인이 보여준 헌신과 나눔을 통해 후손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전통으로 세울 것이고 우리 사회는 이 가문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생의 끝은 슬프다. 사랑하는 고인을 떠나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고인이 몹시 아끼던 손녀 서연(15·김진용 교수의 큰딸)양은 할아버지가 벌써 보고 싶다. 할아버지가 사준 추어탕 때문에 키가 많이 큰 것 같다고 생각하는 큰손녀는 할아버지께 쓴 편지에서 이렇게 그리움을 달랬다.
"교회 어른 예배 맨 앞자리가 비워 있는 것을 보면 많이 슬플 거예요. 교회 점심때 할아버지 자리가 비어있는 것도요. 더 이상 안아드리지 못해 안타까워요. 할아버지께서는 약속이 늦으시더라도 제 얼굴 한 번 보시고 항상 '학원에 데려다 줄까?' 하고 물어보신 모습이 정말 제 기억에 남을 거예요. 할아버지 많이 보고 싶어요. 나중에 천국에서 웃는 얼굴로 만나요."
6일 성남시립화장장 '영생원'에서 한줌의 재가 된 고인은 경기도 광주시 시안공원묘지에 안장됐다.
|
▲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이웃 사랑과 나눔의 생애를 마친 고(故) 김성규 장로 여기 고이 잠들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