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술김에 한 섹스는 즐거움이 아닌 사고
술 마시기를 즐기는 사람으로서 나는 취해서 다른 사람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거나 주사를 부린다거나 민폐를 끼치는 것은, 술에 대한 그리고 함께 마신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나이 든 싱글 여자가 술에 취하는 모습은 너무너무 보기 흉하다. 그렇게 흉칙하게 쓰러지고 나니 한 남자가 급히 일어서서는 나를 술자리에서 데리고 나왔다. "안 데려다줘도 돼요, 저 혼자 잘 갈 수 있어요!" 취중에도 떼를 쓰는데, 이 남자 갑자기 손을 확 잡는 거다.
그런데 이게 참 묘하다. 그 전까지 내 취향도 아니고, 별 관심도 없던 이 남자가 내 손을 꼭 잡는 순간, 갑자기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다정한 남자로 변신하는 것이다. 20여 분 나란히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흔히 말하는 '교태'를 잔뜩 부렸던 것 같다.
예의 바르고 게다가 만난 적이 두 번밖에 없던 그는 다행히 집 앞에서 "잘 자요~" 하면서 돌아갔는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내가 미쳤지, 미쳤어~" 하면서 머리를 쥐어박았다. 간밤 그가 조금이라도 흑심을 품었다면, 혹여 가로등불 아래서 입술을 덮쳐왔더라면 더 나아가 은밀한 애무를 했더라도 나는 별 도덕심이나 책임감 없이 덥석 품에 안겼을 게 뻔했던 것이다.
"술 마시면 사고를 칠 수밖에 없어" 하며 내가 남자들과 술 마시는 걸 질색하던 옛날 애인이 떠올랐다. 그의 말이 맞다. 술에 취하면 나는 오래된 지병인 애정결핍증이 재발한다. 나에게 친절한 아무하고도 잘 수 있을 것 같아진다. 맨 정신일 때는 맞은 편에 앉은 이 남자가 나를 정말 좋아하는 건지 술 취한 나를 하룻밤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건지 빨리 알아차리는데, 술만 취하면 '에라이, 어차피 죽으면 썩어문드러질 몸, 아껴서 뭐 하냐, 그냥 지금 이 순간 얘기 잘 통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봐주는 남자와 몸이 원하는 대로 즐기자' 심리가 발동하는 것이다.
일부러 밀린 성욕을 해소하고자 술기운을 이용했다면 다음날 몸과 마음이 상쾌하겠지만, 역시 여자들에게는 자기 검열이 있는 게 문제다. '나는 간밤 왜 그렇게 쉬워 보였을까, 그는 영원히 나를 헤픈 여자로 기억할 것이다, 앞으로 그 남자 얼굴을 어떻게 보니.' 후회와 자기비하가 남는 섹스가 얼마나 유쾌하지 못한지 나는 이미 여러 번 경험했다. 그건 '섹스'가 아니라 술 먹고 친 '사고'일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어려워진다. 욕망에 충실하되, 헤퍼지지 않는 것. 나의 욕망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 간밤의 그 남자에게 진심으로 말하고 싶다. 나와 자지 않아서, 정말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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