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지현의 에로틱 칵테일

(43) 아무나 앉을 벤치에는...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1. 2. 19. 20:21

(43) 아무나 앉을 벤치에는...

 

사무실 근처에 오래 알고 지낸 후배 녀석이 있다. 대학 때부터 꾸준히 친했고 졸업 후에는 내가 일하는 계통의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좋은 일자리 있으면 연결도 해줬다.

그럼에도 사는 게 팍팍한지라 1년에 두어 번 술 먹을까 말까 하는 사이로 전락해갈 무렵 그가 우리 사무실 근처로 취직하게 되었고, 그 뒤로는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종종 마주치기도 했다. 소심하고 어린 남자아이 같던 그가 서른 줄에 들어서니 키도 예전보다 훨씬 커지고 옷도 잘 걸치고 다니는 게 '제법 남자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이놈도 종종 "누나는 날이 갈수록 회춘하네~" 식의 멘트를 날려주니 꽤 귀엽기도 했다.

얼마 전 간만에 둘이 이른 시간부터 만나 소주를 들입다 먹었다. 진탕 취해서 집에 가려는데 "누나 취했어" 하면서 덥석 택시를 함께 타는 거다. 그렇게 집 앞까지 바래다준 녀석이 얼마나 귀엽고 고맙고 사랑스러워 보이는지 "자, 여기까지 데려다주었으니까 뽀뽀~" 하고는 입술에 가볍게 뽀뽀를 해주고는 냅다 집에 들어왔다.

"누나~ 취했어, 정말. 내가 착한 남자라서 다행이지 다른 남자였음 정말…" 하며 집에 돌아간 녀석은 그 뒤로 매일 아침마다 메신저로 말을 걸어오고는 '영화 보러 가자, 놀러 가자' 하며 들이대는 것이다. '아, 내가 외로운 녀석한테 실수했구나' 싶어서 재빨리 녀석에게 소개팅을 주선했는데, 또 녀석은 당장 그녀가 너무 마음에 든다고 난리다. '이런 여자를 왜 이제 소개시켜줬냐, 그녀가 이렇게 말한 걸 보면 나한테 관심 있는 거 같다' 하며 설레발을 치더니 얼마 안 가 그녀에게 거절당했다.

"누나,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 여자들은 나를 쉬어가는 벤치 취급해. 잠깐 앉았다가 일어나려고 하는데 내가 붙잡으면 '그래 좀더 쉬었다가 갈까' 하면서 좀더 앉았다가… 결국에는 자기 목적지를 향해 가버리는 거야."

흠. 녀석은 기본적으로 밋밋하고 착해 보이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가 아무나 좋아할 수 있는 남자'라는 것이다. 그는 내 아주 사소한 스킨십에 나를 좋아할 수 있고, 소개팅에서 자신에게 먼저 호감을 보이는 친절한 여자도 좋아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가 연애하고 싶은 남자는, 내가 '나'이기 때문에 사랑해주는 남자다.

너는 나를 좋아할 수 있지만, 하지만 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나여서가 아니야. 요악하면 이 정도가 될까. 아무나 앉을 수 있는 벤치에 평생 걸터앉을 여자는 별로 없다는 뜻이다.

"'여자들이 왜 나를 안 좋아할까'라는 생각을 하기 전에, 니가 진정 좋아하는 여자를 찾아. '너무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어'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를 쟁취하는 솔루션을 제공해줄 게."

그가 내 말을 잘 알아듣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뒤로 메신저로 말 거는 횟수가 줄어들었으니 어쩌면 그는 평생 자신의 벤치에 앉을 여자를 찾아 헤매는 중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