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취미생활 여행

중남미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1. 3. 28. 19:17

★중남미(33)꾸스코/락치마을의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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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33)꾸스코/락치마을의 유적지

 

국  명: 페루
코  스: 꾸스코- 푸노 이동중- 오로페사- 로미꼴까- 삐니빰빠- 락치마을 

 꾸스코에서 버스를 타고 푸노로
가노라면 락치(Racchi)마을을 경유하게 된다.
이곳은 해발 3600m의 고원 분지이나 사방으로 안데스의 고봉들이
병풍처럼 둘러 처져 있어 아늑한 평야
같은 느낌을 준다.

락치마을은 잉카시대에 걸쳐
가장 거대하고 성스러운 뷔라고차 신전이라고 하는
유적이 마을 한가운데에 있다.

이곳 역시 스페인 침략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 되였고 유적 입구에는 그들이 세운 스페인식
교회가 이방인을 먼저 맞이하고 있었다.

이 유적은 원래 프리잉카시대
뷔라고차 신의 창조신화로부터 등장하는 곳이지만
현재 남아 있는 유적들은 11대왕 “와이나 까빡”에 의해 지어진
건물들의 일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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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치마을에 들어서니
제일먼저 눈에 띄는것은 역시 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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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들어가니 아담하고
화려하지도 않은 평범한 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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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치 마을앞 시장에는
작은 소품에서부터 알파카 쇄터까지 다양하게
물건을 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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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품을 파는 원주민 여인들은
복장과 모자만 같은 것이 아니라 머리모양도 같았다.
그런데 대부분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내린 모습이었다. 두갈래는 기혼자이고
하나로 땋은 머리는 미혼자라고 한다. 뚱뚱한 체격에 같은 색의
통치마와 셔츠를 입고 모자를 쓰고 있으니
구분하기가 쉽지가 않다.

페루를 여행하면서
어쩐지 몽고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
같은 외형에 독특한 의상으로 장식한 페루여인들에
유심히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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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동안 남의 나라에 짓밟혀
식민지로 착취와 수탈의 치욕의 질곡속에서
인고의 세월들을 힘겹게 견뎌온 그들의 체취에서 내면의
고통이 은연히 나타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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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을 뒤로하고 교회
옆 쪽으로 나가보니 우리 제주도모양
돌로 담벽을 쌓아 놓았는데 그 담벽 앞으로 개울물이
흐르고있었고 그물에 빨래를 하는
여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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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골목안으로 들어서면
지붕이 덮혀있는 유적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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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라코차 신전

유적지에 들어가면 길이 90m
높이 15m의 큰 건물이 서 있는데 아래 약 3m는
돌로 쌓아졌고 그 위에는 흙벽돌로 쌓아져 있다. 벽에는 10개의
사다리꼴 모양의 문이 나 있고 위에는 빨간 기와지붕을 씌워 놓았는데 그것은
최근에 흙벽을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벽의 양옆으로는 한쪽에 11개씩
22개의 둥근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이 기둥들은
서까래를 받쳐 지붕을 씌울 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이 건물은
잉카의 건축물 중에서 가장 크고 아주 독특한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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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건국신인 "비라꼬차"를
기리기 위해 세운신전인데 3번의 지진에도
무사함은"비라꼬차" 신이 도와
주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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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 밑 부분의 축조 기술은
이곳에서도 잉카인들의 정교한 솜씨가
엿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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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창고들은 파괴
되었지만 아래쪽 몇 개가 새로 복원되어
원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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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으로는 6쌍의 똑같은
건물들이 나란히 있는데 그 구조로 보아 병사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옆으로 잉카제국의 사회복지제도의
정수인 공용 창고 “삐우라“들이 세워졌는데 창고 가장자리에
견고하게 담이 둘러 처져 외부의 침입을
방지한 흔적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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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약 200개의 창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면서 곡물을 비롯하여
생필품을 보관하고 고도의 복지정책을 써 백성들의 불만을
안정 식힌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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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신전이 있던 곳으로
현재 그 담 일부가 남아 있다. 당시
곡물 창고로 사용한 듯한 건물들이 여기저기 있다.
지금도 이곳은 곡창지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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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시대 초기학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신전의 핵심부에는 "뷔라고차"
신의 모습이 돌에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데 그는 아주 키가 크고 건장한
남자였으며 손까지 내려오게 턱수염을 기르고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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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옆에는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맹수가 한 마리 있고 뷔라고차가 맹수의
목에 연결된 끈을 손에 쥐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모습은 마치
기독교에서 말하는 12사도중 성 바돌로메(Bartholomew) 같았기 때문에 초기
스페인들은 그가 이곳에 와 전도를 하고 문명을
전파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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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제국이 스페인 소규모 군에
쉽게 멸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겠으나 "뷔라고차"의
전설신화도 한몫을 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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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형제간의 권력투쟁으로
분열된 약화된 국력도 주원인이 되었겠지만
오래전부터 잉카인들의 이러한 전설상의 이야기가 순수한
정서가 되어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에게 도움을 주게 되였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일이라 아니 할 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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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제국에서는 정말 전설 속에
백인처럼 몸이 하얀 “뷔라고차”라는 인물이 존재
하였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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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섬기며 태양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뷔라고차"는 바다로부터 와서 잉카인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결코 힘을 사용하지 않으며 잉카인들에게 문명을
가르쳐 주고 사라졌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잉카인들은 언젠가는 그가
살아진 방향에서 다시 되돌아온다는 믿음을
굳게 가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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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전설신화 속에 각인된
잉카인들에게 정말 "뷔라고차"가 살아진
방향에서 희한하게 생긴 동물(말)을 타고 처음 보는
무기(화승총)를 가지고 몸이 하얀 여러 명의
사람들과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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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그들이 바로 침략자
에스파냐의 “피사로” 일행 이였는데
잉카인들은 처음 보는 동물들과 그리고 그들이 몸이 
하얀 백인이라는 사실에 전설속의 인물로
착각을 하였든 것이다.

피사로는 그러한  사실을
재빨리 간파하고 스스로 전설속의
뷔라고차로 행세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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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잉카황제 "아타와르파"는
전설의 “뷔라고차“가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에
비무장의 수행원만 데리고 그것을 확인하러 피사로와 만나게 된다.
그때 피사로는 신부를 앞세워 성경을 내어주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였는데 말도
안통하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잉카의 황제는 그것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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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군들은 하나님을 거부한
사탄들이라며 일제히 뛰어나와 비 무장한 인디언들을 기습
공격하여 순식간에 황제를 체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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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황제가 사로잡히자 후위의
무장한 인디언도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였으며
에스파냐군은 짧은 시간에 단 한명의 병력손실도 없이 잉카제국을
정복하게 된다는 잉카멸망의 웃지 못할
역사의 한 단면이다

1532년이면 오랜 옛 석기시대도
아닌 우리나라의 조선 11대왕 중종시대인데
이렇게 허망하고 어리석게 나라를
빼았길 수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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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투영된 교회의 모습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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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빛이 파랗고 구름이 고운날,
잉카시대를 거쳐온 "뷔라고차"의 유적지에서
돌아서며 많은 생각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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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카<우아까야(huacaya)>

점심식사를 한 식당 앞에서 담은 것이다.
식당앞 노점상 공터에 이쁘게 치장을 해놓고 알파카를
관광용으로 데려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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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위 앞으로 가까히
다가서니 먹을것이라도 주는냥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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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앞에서 담은
기차길이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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