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지현의 에로틱 칵테일

(126) 섹스하려면 연애해야하는 사회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1. 12. 19. 20:11

 

[김지현의 에로틱 칵테일] (126) 섹스하려면 연애해야하는 사회

그가 나에게 마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전형적인 좋은 남자였다. 요리도 잘하고, 착하고, 친절하고 다정했다. 꽤 안정적인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유머감각이 뛰어나지 않은 게 흠이긴 하지만 나름 인덕도 있어 보였다. 문제는 내가 그를 남자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몇 개월 동안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니!

그냥 사귀어볼까, 애인 없은 지도 꽤 됐는데…. 애인 없은 지 꽤 됐다는 것은 섹스한 지도 꽤 됐다는 뜻이다. 얼마 전에는 얼굴도 알 수 없는 남자와 찐하게 몇 번에 걸쳐서 섹스하는 꿈까지 꿨으니, 이건 내가 엄청난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섹스를 하고 싶은 거지, 연애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떻게 연애와 섹스가 별개의 것이 될 수 있어?"라고 묻지만 알 사람들은 안다. 섹스가 땡길 때와 사랑이 땡길 때가 완연히 다르다는 것을.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충분한 감정적인 교류를 나누고 그게 자연스럽게 육체로 이어간다면, 세상에 그렇게 아름답고 완벽한 섹스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나는 사실 이제 연애나 사랑은 좀 지긋지긋하다. 한 남자를 만나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또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들어주고, 밀고당기기를 하며 날 더 좋아하게 만들고, 없는 시간을 짬짬이 쪼개 영화나 뮤지컬을 즐겨주고, 언제쯤 키스를 해올까 조마조마하게 기다려야 하는 그런 연애. 내가 더 많이 그를 사랑하는 것에 마음 아프고 혹여 이별할까 마음 졸이고 사랑받을 때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다가 뜸해질 때는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은 그런 사랑.

그런 연애나 사랑 따위는 다 집어치우고 온몸의 긴장을 풀고 혹독한 일상을 피해 도망칠 수 있는 섹스, 감정이 얽히지 않은 채로 딱 내 몸의 오르가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섹스, 나와의 섹스가 좋은지 안 좋은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섹스만 하고 싶은 거다.

그러나 불행하게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섹스를 해본 적이 없다. 섹스하고 싶을 때 나는 연애를 했다. 섹스가 하고 싶었으므로 시간이 흘러 섹스가 식상해졌을 때, 더 이상 그 남자와 공통분모가 없었고 단점만 보였고 더 이상 살 부대끼는 게 싫어졌다. 생각해보면 내 모든 연애의 60%가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어쩌랴, "네가 좋아"라고 진심 어린 눈으로 말하는 남자에게 "난 너와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하지만 섹스는 하고 싶어. 그러니까 나랑 섹스만 해주면 안 될까?"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똑같이 "네 몸만 원해, 넌 쿨한 여자잖아" 하면서 대놓고 섹스만 원하는 남자를 만나 '쉬운 여자' '헤픈 여자'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대한민국 어떤 남자든, '헤픈 여자'를 사랑하고 진심으로 대하는 남자는 없으니까.

이 모순 속에서 결국 짧으면 몇 개월, 길면 몇 년까지 섹스 없이 살아야 하거나, 아니면 사랑하지 않는 남자, 조만간 이별할 게 보이는 남자와 울며 겨자 먹기로 연애를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는 섹스하기 위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연애를 하거나 아니면 나이트, 클럽을 헤매는 '헤픈 여자' '헤픈 남자'가 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