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능선 운해에 설악과 사랑에 빠지다.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운 것이 모두 산이다. 고니가 나는 듯하고 칼이 서 있는 듯하고 연꽃이 핀 듯한 것은 모두가 봉우리요, 오지그릇 같고 동이나 항아리 같은 것은 모두가 골짜기이다.' < 정범조(1723∼1801)가 쓴 '설악산 유람기' >
설악산(1708m)은 한반도 최고라는 북녘의 금강산(1638m)과 쌍벽을 이룰 만큼 빼어난 미모를 지닌 명산이다.
대청봉, 공룡능선, 천화대, 범봉, 용아장성…. 하늘을 향해 타오르는 돌불꽃 석화성(石火星)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심장이 터질 듯한 감동을 안겨준다. 때맞춰 피어오른 새하얀 운해가 암봉들을 휘감는다면 그 누구라도 설악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사계절도 변화무쌍하다. 봄이면 야생화가 만발해 천상화원을 연상케 하고, 여름은 기암괴석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가 청량감을 더한다. 울긋불긋 물든 단풍나무와 암봉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가을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게다가 북풍한설의 눈발 너머로 드러나는 설경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가을풍경이 사라져 가는 늦가을, 설악산 종주에 나섰다. 설악산 종주코스는 여러 개가 있다. 그 중 한계령에서 서북능선을 타고 대청봉을 거쳐 공룡능선 마등령, 비선대, 소공원 코스(23km)는 설악산 산꾼들의 로망이다. 당일치기는 무리지만 중청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묵는다면 도전해볼만하다.
가수 양희은의 노래 '한계령'으로 인해 더욱 친숙한 한계령에 섰다.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과 양양군 서면을 잇는 해발 1004m의 한계령은 설악산국립공원을 관통하는 고갯길이다.
한계령휴게소 뒤편의 가파른 계단을 따라 설악루에 오르자 화려했던 가을의 기억을 간직한 단풍잎들이 산길에 쌓여 융단처럼 폭신폭신하다.
발끝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 밝는 소리와 함께 오르막과 내리막을 몇 차례 반복하자 서북능선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깎아지른 듯 급경사의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서북능선은 하얗게 속살을 드러낸 초겨울 풍경을 담고 있다.
한계령에서 서북릉삼거리를 거쳐 끝청과 대청봉에 이르는 코스는 백두대간 능선으로 8.6㎞. 서쪽의 귀때기청봉과 동쪽의 대청봉을 잇는 능선 안쪽으로 용아장성의 뾰족뾰족한 바위봉우리들이 저마다 웅장한 모습을 자랑한다.
주목나무 고사목들이 이국적인 풍경을 그리고 천길만길 낭떠러지 아래로는 오색물감을 풀어놓은 듯 아직 떨어지지 않은 단풍잎이 드문드문 보인다.
고려의 문신 안축은 설악산에 반해 '금강산은 수려하기는 하되 웅장한 맛이 없고, 지리산은 웅장하기는 하되 수려하지 못한데, 설악산은 수려하면서도 웅장하다'고 감탄했다.
대청봉과 중청봉(1676m) 사이에 위치한 중청대피소에서 맞는 설악산의 밤은 벌써 한 겨울이다. 살을 에는 듯한 거센 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밤새 닫혀있던 하늘이 열린다. 멀리 동해바다에서는 단풍잎보다 붉은 여명의 띠가 드리워진다. 어둠 속에 침잠했던 설악산 능선들은 안개 속에서 한 폭의 수묵담채화를 그린다.
장엄한 일출이 운해를 뚫고 불끈 솟아오른다. "올 들어 가장 아름다운 일출입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말했다. 1년에 몇 번 볼 수 없다는 설악산의 일출을 품고 길을 나선다.
중청봉의 허리를 에둘러 소청봉(1550m)에서 희운각대피소까지 줄곧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는다. 여인의 피부처럼 하얀 자작나무는 나신이 부끄러운 듯 마지막 잎새로 몸을 가리고 주목나무는 화석처럼 굳어 설화를 꽃피울 날을 기다린다.
대피소 아래의 무너미고개는 공룡능선과 천불동계곡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단풍이 한창일때라면 천불동코스를 택하겠지만 종주가 목적이기에 공룡능선을 택한다.
공룡능선을 타기에 앞서 신선대로 방향을 잡는다. 신선대는 공룡능선의 여명과 운해를 담기 위해 사진가들이 진을 치는 곳이다.
해골바위 옆에서 뒤돌아보자 공룡능선이 앞 동네처럼 있고 마등령, 범봉, 천화대, 울산바위 등이 늘어선다. 줄곧 내달려온 서북능선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대청, 중청, 소청 아래로 용아장성이 줄을 서고 귀떼기청봉과 안산, 내설악까지 장쾌한 설악의 고봉들이 도열한다.
신선대에서 운해를 만나는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다. 운해는 꿈틀거리며 용솟음치듯 치솟는다. 어느새 암봉을 휘감아 돌며 끝자락에 걸린 단풍을 털어내며 동해로 향해 내달린다.
운해를 찍기 위해 새벽부터 꼼짝하지 않고 기다린 작가들의 시기섞인 농담을 받으며 공룡능선의 운해를 담는다.
본격적으로 공룡능선에 오른다. 이름부터 남성적인 판타지를 강하게 풍기는 공룡능선은 설악의 기암절벽 풍광의 정수로 꼽힌다. 이중 공룡릉은 희운각대피소앞에서 마등령까지 능선구간을 가리킨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무색할 정도로 암벽미가 뛰어난데다 공룡능선에서 굽어보는 내설악과 외설악의 사계절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지형과 몸집으로 본다면 희운각은 공룡의 꼬리, 마등령으로 고개쯤 된다. 따라서 능선에 오르기 위해서는 길게 늘어진 꼬리를 따라가야 한다. 꼬리는 힘이 세고 꼬리를 밟는 사람들도 힘이든다. 등산로는 모두 바위의 왼쪽으로 나 있다. 오른쪽은 그야말로 아찔한 절벽이다.
드디어 공룡의 우툴두툴한 등뼈에 도착했다. 돌아보니 희운각 주위가 어느 새 짙은 안개로 빽빽해졌다.
왼쪽으로만 구부러지던 등산로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꿀 때, 그때는 바로 지친 등산객들이 한 고비를 넘기는 순간이다. 공룡이 능선을 다 탔다며 등반객을 등에서 내려준다. 그 바뀌는 방향에서 힘을 다시 길어 올린다. 이윽고 마등령이다. 왼쪽으로 가면 오세암, 오른쪽으로 가면 비선대 방향이다.
낙옆이 깔린 산길은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계속되는 내리막에 가도 가도 그 길을 걷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지루하지만 설악산종주를 앞두고 있다는 기분에 발걸음은 힘이 넘친다.
비선대는 설악산을 찾는 사람들의 만남의 광장이다. 소공원에서 산책삼아 오른 사람들과 설악산종주에 나선 산행객들로 항상 북적인다.
비선대를 내려서면 소공원까지 40분거리다. 내려서는길, 끝물의 단풍 위로 우뚝 솟은 와선대와 비선대를 배경으로 천변만화하는 안개의 조화에 설악산의 절경이 가슴에 박힌다.
설악산(속초)글ㆍ사진 조용준 기자 jun21@asiae.co.kr
◇여행메모
△가는길=
한계령에서 대청봉과 공룡능선, 마등령, 비선대를거쳐 설악동 소공원에 이르는 종주코스는 23㎞다. 중청대피소에서 하룻밤 묵은 후 하산하는 일정이 알맞다.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를 생각하면 두터운 방한복을 준비해야 저체온증을 견딜 수 있다.
이달 15일부터 내달 15일까지 한달간은 산불조심기간으로 고지대 등산로는 임시폐쇄된다. 흔들바위코스, 비선대코스 등은 그대로 운영된다.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 (033-636-7700), http://seorak.knps.or.kr
△등산코스=
설악동 소공원~비선대~귀면암~양폭산장~희운각대피소~공룡능선~마등령~비선대~소공원 원점 회귀 코스. ▲설악동~비선대~귀면암~양폭~희운각~소청~중청~대청~오색 ▲설악동~비선대~마등령~공룡능선~희운각~소청~설악산장 ▲용대리~백담사~수렴동대피소~쌍폭~봉정암~소청~설악산장 ▲남교리~탕수동~대승령~귀청~한계령 갈림길~설악산장 등이다.
가족과 함께라면 케이블카를 타고 신흥사 입구에서 권금성에 올라 울산바위, 금강굴 일대를 바라보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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