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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 터널… 능선 파도… 운무의 江 최고의 ‘겨울 드라마’가 흐르다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2. 1. 11. 23:56

눈꽃 터널… 능선 파도… 운무의 江 최고의 ‘겨울 드라마’가 흐르다
▲  덕유산 향적봉에서 중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한 사진가가 가야산과 비계산, 황매산의 첩첩이 이어진 연봉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겨울 덕유산에는 화려하게 피어난 눈꽃과 함께 겨울 산의 장엄함을 담으려는 사진가들의 발길이 잦다.
▲  눈꽃과 상고대가 터널을 이룬 덕유산 등산로. 내내 이런 순백의 풍경 속을 뽀드득 뽀드득 딛고 걷는다.
▲  무주의 반디별천문과학관에 설치된 800㎜ 반사망원경.
# 겨울의 장엄한 정취를 만나러 가는 길…덕유산

무진장(無盡藏). ‘무진(無盡)’이란 ‘다함이 없다’는 뜻이고, ‘장(藏)’은 창고를 뜻하니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다함이 없는 창고’라는 뜻이다. 이걸 불교에서는 ‘덕이 광대해 다함이 없음’을 설명하는 말로 쓴다. 뜻은 버리고 음만 빌려와서 전북의 지붕을 이루는 무주와 진안, 그리고 장수를 한데 묶어서 ‘무진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때의 무진장이란 두말할 것없이 첩첩산중의 오지를 말하는 것일 터다.

그 ‘무진장’의 한복판에 무주가 있다. 무주와 진안, 장수는 한겨울에 더욱 깊어지는 땅이다. 내륙의 산들이 가로막은 이들 지역은 겨울이면 혹한의 땅으로 변한다. 무진장의 추위가 단단하게 아름다움으로 뭉쳐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덕유산이다. 이맘때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덕유산이 빚어내는 장엄함이란, 만나보지 못한 이라면 감히 짐작조차 못한다. 덕유산은 한발 한발 걸음을 더해 오를수록 점입가경의 풍광을 선사한다. 우람한 눈꽃터널의 화려함을 지나 철쭉의 관목이 눈으로 뒤덮인 능선의 웅장함을 만나고, 눈 덮인 산자락을 이리저리 빠르게 넘나드는 운무까지 마주친다면 ‘겨울이 빚어낸 최상의 풍경’과 마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유산의 설경은 눈이 쌓여 이루는 ‘화려한 치장’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시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향적봉을 오르는 길에서, 중봉을 향하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고사목들은 스스로 지나온 시간을 증명한다. 살아서 1000년, 죽어서 1000년, 그리고 넘어져서 또 1000년의 시간을 보낸다는 주목의 나뭇결을 따라 하얗게 상고대가 피어났다. 산 나무든, 죽은 나무든 가릴 것 없이 한데 어울려서 순백의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흰 입김을 뿜으며 그 순백의 장엄함 앞에 선다. 이런 순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겨울 덕유산을 오르는 가장 큰 이유이겠다.

올해는 덕유산의 눈이 많이 늦었다. 덕유산에는 보통 12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눈이 쌓이고, 그 눈이 녹기 전에 다시 쏟아져 내린 눈이 덮여지길 몇 번이나 했겠지만, 올해는 눈소식이 늦게 당도했다. 덕유산에는 지난주에 들어서야 비로소 눈다운 눈이 내렸다. 그때 이틀 동안 밤새워 내린 눈이 지금은 무릎까지 푹푹 빠진다.

늦게 당도해서 그럴까. 덕유산의 눈꽃은 여느 때보다 더 화려하다. 가지마다 붙은 눈꽃과 운무와 서리가 얼어붙어 만든 상고대도 더욱 풍성하고 곱다. 그러니 덕유산의 눈꽃을 보겠다면 지금처럼 좋을 때는 없겠다.



# 눈 덮인 능선을 따라 피어나는 운무

덕유산은 최고봉인 향적봉이 해발고도 1614m로 남한 땅에서 네 번째로 높다. 무주구천동에서 출발해 백련사를 거쳐 정상에 닿으려면 족히 대여섯 시간은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에서 땀깨나 흘릴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무주 덕유산리조트의 곤돌라를 타고 오른다면 20분 남짓이면 정상인 향적봉에 닿게 된다. 고된 발품 없이 산정에 올라 순백의 화려한 눈꽃 풍경을 대하노라면 공연히 송구스러운 느낌마저 든다.

겨울 덕유산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은 눈꽃에만 있지 않다. 덕유산은 향적봉을 중심으로 해발고도 1300m를 넘나드는 거대한 능선을 이룬다. 이 능선이 남서 방향으로 무려 30여㎞가 넘는다. 능선을 딛고 서면 지리산을 위시한 일대의 산들이 다 건너다 보인다. 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이 몰고 다니는 운무는 이런 풍경들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덕유 일대의 봉우리들은 물론이거니와,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정점으로 겹겹이 이어지는 푸른 능선을 따라 운무가 몰려다니는 모습은 탄성을 자아내게 하기 충분하다. 한꺼번에 밀려온 운무가 주위의 풍광을 다 지웠다가 일순간 벗겨지면서 짙푸른 하늘이 드러날 때의 감동이라니….

덕유산의 구름과 안개는 예부터 유명했던 모양이다. 하기야 운무가 순식간에 주변 풍광을 가렸다가 토해 놓는, 천변만화의 모습 앞에서 누구든 감격하지 않을 수 있을까. 500여년 전 거창군 북상면 사람인 갈천 임훈. 그가 승려 혜옹과 함께 덕유산 향적봉을 올랐다. 그는 기행문 ‘등덕유산향적봉기’에서 “모든 산의 바깥과 안이 이곳에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 모양이 갑자기 변하는 것은 아름다운 구름이고, 멈추어 변하지 않는 것은 과연 산인데 하물며 그 이름과 지명을 다시 분별할 수 있겠는가”라고 썼다. 500년 뒤의 덕유산 풍광도 그의 말 그대로다. 눈꽃 핀 능선을 휙휙 지나는 구름들이 일대의 산을 가렸다가 토해 놓고, 다시 가렸다가를 반복한다.



# 적상산, 그리고 와인과 얼음축제

지금이야 무주의 산이라면 덕유산을 떠올리지만, 예전에는 적상산을 더 쳐줬던 듯하다. 해발고도나 산의 크기는 덕유산에 어림도 없지만, 적상산은 웅장한 병풍바위를 허리춤에 휘감은 자태부터가 범상찮다. 범접할 수 없는 입지와 영험한 기운으로 적상산 정상에는 일찌감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세워졌다.

옛 문헌 속에서도 덕유산보다 적상산이 더 많이 언급됐다.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무주 사람 이종화는 적상산을 오른 뒤 ‘앞으로 산을 유람하는 일을 끊겠다’고 했다. 그는 친구 두 명과 마이산, 계룡산, 속리산을 돌아보고 토론을 했다. 그가 ‘기묘한 봉우리와 암석은 하늘이 만든 것이니 글과 말로 다 기록할 수 없다’고 했더니, 다른 친구가 ‘그래 봐야 우리 고을 적상산만 못하다’고 말을 받았다.

사흘 뒤 그는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적상산에 오른다. 그리고 남긴 기록이 이렇다. “수많은 산봉우리와 산기슭이 겹겹으로 겹치며 굴곡을 이루고 혹은 기다란 큰 창을 수많은 군사들 가운데서 서로 빼어드는 것 같기도 하고 상서로운 봉황이 하늘 가운데 나는 것 같았고, 사나운 사자와 늙은 호랑이가 숲속에 걸터앉은 것 같았다.” 그의 글은 이렇게 맺는다. “지금 이후로는 산을 유람하겠다는 뜻을 끊으려 한다.” 적상산 풍광이 얼마나 감동적이었으면 그랬을까.

적상산은 양수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산 정상까지 포장도로가 나있다. 그러나 겨울에는 출입이 통제된다. 눈도 눈이지만, 도로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이 꽝꽝 얼어붙어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적상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무주와인터널까지만 열려 있다. 와인터널은 양수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상부댐과 하부댐을 수로로 연결하기 위해 조성된 작업터널을 와인을 테마로 한 관광명소로 개발한 곳. 이곳에서는 무주 일대에서 빚는 다섯 종류의 머루와인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와인을 맛보려면 와인동굴보다는 직접 와이너리를 찾아가는 편이 더 낫겠다. 무주의 와이너리로는 적상산 등산로 초입의 산들벗을 추천한다. 산들벗에서는 ‘마지끄무주’란 이름의 머루와인과 머루를 가미한 막걸리 등을 생산하고 있다. 별장과 같은 운치있는 통나무집을 시음장으로 쓰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시중가보다 7000~8000원 이상 싼 가격에 와인을 구입해 창밖의 설경을 즐기며 편안하게 와인을 마실 수 있다.

여기다가 겨울 여정이라면 무주 반디랜드 내의 반디별천문과학관을 일정에 더하면 좋겠다. 무주 일대는 대기가 깨끗한 데다 다른 지역에 비해 빛 공해도 덜하니 별을 관측하기에는 더할나위 없다. 800㎜ 반사망원경을 갖춘 천문과학관에서는 매일 오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세차례 별자리 관측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반달이 뜨는 이달 30일쯤이 별을 관측하기에 가장 적합한 날이다. 무주읍 한복판을 흘러가는 남대천에서는 오는 13일부터 닷새 동안 얼음축제가 개최된다. 이곳에 들러 꽝꽝 언 얼음판 위에서 송어낚시와 함께 전통썰매며 스케이트 등을 즐기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