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이야기

철하의 이론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0. 5. 15. 23:04

다음 두 주장을 비교해보자.


“우리는 자명성이나 …… 경험에 근거한 것이거나 …… 관찰에 의해 검증된 명제로부터의 논리적 연역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어떤 진술이 참이라고 확증하거나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어떤 진술이 유의미하다는 것은 그 진술이 참이라는 것을 그 의미에 의해서 분명하게 밝힐 수 있거나, 경험에 의해서 확실하게 혹은 개연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중에 하나는 14세기 초반, 다른 하나는 20세기 초반 철학자의 말이다. 앞에 주장에서 ‘자명하다’는 것은 뒤에 주장에서 ‘의미에 의해서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앞에 주장에서 ‘관찰에 의해서 검증되었다’는 것은 뒤에 주장에서 ‘경험에 의해서 확실하게 혹은 개연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구분할 수 있겠는가? 어느 것이 14세기이고, 어느 것이 20세긴가? 물론 구분하기 쉽지 않다. 사실 이 둘이 말하는 바는 거의 같다.

 

 

 

 

그럼 다시 물어보자. 위 주장들은 14세기와 어울리는가, 아니면 20세기와 어울리는가? 종교가 인간 이성을 심각하게 제한했던, 그래서 일반적으로 학문의 암흑기라고 불리는 중세 14세기와 상대성 이론양자 역학 등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과학이 모든 지식의 모범으로 여겨졌던 20세기 초반 중에서 어느 시대에 더 어울리는 주장인가? 20세기 초반 과학의 엄청난 성공을 경험한 몇몇 지식인들은 그 어떤 학문 분야보다 과학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당시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들이 그런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따라서 과학 특유의 방법을 사용한다면 당면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때 과학 특유의 방법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경험(관찰)에 의한 검증이었으며, 경험에 의해서 검증될 수 없는 주장들, 예컨대 형이상학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주장들은 무의미한 것으로 제거하려고 했다. 이런 종류의 주장을 했던 사람들로는 논리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 혹은 논리 경험주의(logical empiricism)가 대표적이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위의 두 주장은 20세기 초반과 더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두 번째 인용문은 대표적인 논리 실증주의자 중에 한 명인 알프레드 에이어(Alfred Jules Ayer)의 것이다. 그리고 첫 번째가 바로 14세기 초반 중세 철학자의 주장이다. 정말 14세기 초반 중세 철학자의 주장으로 보이는가? 이 주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경험에 의해서 검증되기 어려운 종교적인 주장도 참이라고 확증될 수 없는 것들이 된다. 14세기 초반 중세 철학자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가?

20세기 초반, 과학의 성공을 경험한 몇몇 지식인들은 ‘관찰(경험)에 의해 검증될 수 없는 주장들’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겼다.

 

물론 그렇다. 이해의 실마리는 생략된 부분에 있다. 위 인용문 ‘……’ 부분에는 무엇이 생략된 것으로 보이는가? 자명한 것, 경험에 의해서 검증된 것 이외에 우리가 참이라고 확증할 수 있는 것이 그 부분에 생략되어 있다. 무엇이 생략되었을 것 같은가? 비록 교황과 황제들이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흑사병으로 인해 교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있었던 14세기 초반이었지만, 그때는 여전히 중세였다. 여전히 신의 권능과 말씀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과연 무엇이 생략되었겠는가? 그것은 바로 신 혹은 신의 말씀, 즉 계시다. 이것을 보충하면 위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자명성이나 계시 또는 경험에 근거한 것이거나 아니면 계시된 진리나 관찰에 의해 검증된 명제로부터의 논리적 연역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어떤 진술이 참이라고 확증하거나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윌리엄 오컴을 스케치한 그림(14세기, Ockham's
Summa Logicae에서 발췌).


비록 경험과 계시가 불편하게 동거하고 있지만, 생략되어 있는 부분을 채우니 이제 중세 철학자의 주장이라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주장을 한 중세 철학자는 바로 윌리엄 오컴(William of Ockham)이다. 오컴 자신이 원했던 결과는 아니었지만, 이 경험과 계시 사이의 불편한 동거는 결국 종교와 철학을 조화시키려는 기존 중세 철학자들의 노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게 되며, 이후 홉스와 흄 등의 영국 경험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물론 그 영향은 20세기 논리 실증주의에게도 남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윌리엄 오컴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존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와 더불어 후기 중세 철학 Big3에 포함된다. 1280년대 말 영국 런던 근처 오컴이라는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1347년 즈음 독일 뮌헨에서 (아마도) 흑사병으로 죽었다. 그는 신학자이자, 철학자 그리고 정치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정치적 활동은 그가 참여한 수도사의 청빈에 대한 논쟁과 관련되어 있다. 이 논쟁은 단순히 신학적인 논쟁이 아니었으며, 당시 교황인 요한 22세와 독일 황제였던 바바리아의 루이스(Louis the Bavarian) 사이의 정치적 투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때 오컴은 독일 황제 편에서 그 투쟁을 이끌었던 중요 지도자 중에 한 명이었다.

 

물론 이런 철학 외적 활동 때문에 그가 유명한 것은 아니다. 혹시 당신이 그의 이름을 들어봤다면, 그것은 아마도 다음 두 가지 때문일 것이다. 면도날과 유명론. 과거 인물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가 대부분 그러하듯 오컴의 철학을 ‘면도날과 유명론’으로 요약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면도날로 비유되는 철학적 원칙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엄격하게 말하자면 유명론자도 아니었다. 이제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검약의 원칙(principle of parsimony)’, ‘경제성의 원칙(princple of economy)’과 같은 말로 사용되는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은 일반적으로 ‘존재자의 수를 불필요하게 늘려서는 안 된다.(Entia non sunt multiplicanda sine necessitate)’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에 따르면 달 윗 세계(천상계)에서 성립하는 물리법칙과 달 밑 세계(지상계)에서 성립하는 물리법칙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뉴턴의 역학은 그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달 위의 세계든, 달 밑의 세계든 오직 하나의 물리법칙만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뉴턴 역학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불필요하게 다수, 즉 천상계와 지상계를 상정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검약의 원칙은 이 둘 중에서 그런 것을 상정하지 않고 보다 단순한 뉴턴 역학을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오컴의 면도날에서 ‘면도날’은 이론에 불필요하게 추가된 존재자를 싹둑 잘라 버리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검약의 원칙에 왜 ‘오컴’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오컴 이전의 철학자들, 가령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는 물론이고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이런 원칙은 발견되며,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용어는 오컴이 죽은 후 수 세기가 지난 19세기에 처음 등장했다. 한편 검약의 원칙으로 흔히 알려져 있는 ‘존재자의 수를 불필요하게 늘려서는 안 된다.’라는 경구도 오컴의 글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검약의 원칙에 그의 이름이 붙은 것은 기껏해야 오컴이 그 원칙을 가장 충실하게 적용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그가 이 원칙을 어떻게 적용하는지 이해하는 데 있어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오컴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검약의 원칙은 맨 처음 소개한 인용문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 인용문은 무언가를 참이라고 확증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에는 신의 계시, 경험 등이 포함되어 있다. 즉 오컴의 검약의 원칙은 충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참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지성에 적용되는 원칙이다. 다른 말로 우리가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립하는 데 있어 갖추고 있어야 할 원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원칙은 신이 만든 이 세계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다른 말로, 오컴에게 있어 ‘신은 이 세계를 만들 때 불필요하게 존재자의 수를 늘리지 않았다’, 혹은 ‘신은 이 세계를 가장 간단하게 만들었다.’는 식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신학자인 오컴에게 있어 모순을 제외하고 신에게 불가능한 것이란 없다. 여기서 모순을 제외한다는 것은 ‘둥근 사각형’, ‘결혼한 총각’과 같은 것은 신도 만들 수는 없다는 말이다.

오컴은 모순을 제외하고 신에게 불가능이란 없다고 보았다. 신이 원한다면 물리 법칙에 위반되더라도 무거운 물체가 위로 올라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순을 제외하고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신에게 불필요한 존재자를 늘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며, 신이 원한다면 이 세계는 충분히 그렇게 만들어졌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신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 법칙을 위반하는 일들을 할 수 있으며, 물리 법칙 없이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무거운 물체는 아래로 떨어지기 마련이지만, 신이 원한다면 무거운 물체가 위로 올라 갈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기적은 가능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신만이 필연적이며,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우연적이다. 여기서 우연적이라는 말은 동전 던지기와 같은 임의성(randomness)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필연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지금과 달랐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오컴의 면도날과 더불어 한 가지 더 언급할 만한 것은 그의 유명론(nominalism, 唯名論)이다. 먼저 유명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당신은 지금 어딘가에 앉아 컴퓨터를 보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인간일 것이다. 인간인 당신은 존재하는가? ‘존재’라는 말이 들어 있다고, 당황할 필요 없다.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당연히 존재한다.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고 의심할 수 있다. 아무튼 우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인간인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당연하다면, 이제 다시 물어보자. 당신은 몇 개인가? 당연히 1개다. 이것은 의심스럽지 않다. 당신과 아주 유사한 일란성 쌍둥이 동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쌍둥이 동생은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분명 하나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당신은 지금 PC방에 앉아 있다. 당신 옆에는 친구들이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다. 당신 친구들 각각은 다 하나이다. 기한이도 하나이고, 규삼이도 하나이고, 미노도 하나이고, 석이도 하나다. 하지만 인간은 모두 몇 명인가? 인간인 당신과 당신 친구들 각각은 하나이지만, 인간은 하나가 아니다.

 

이렇게 인간 각각은 하나씩 있지만 인간은 여럿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언가를 가정하고 있다. 즉 인간인 당신과 당신 친구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정하고 있다. 보통 그런 것을 ‘보편자’(universals)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보편자를 가지고 있는 각각의 인간과 같은 것을 ‘개별자 ’(particulars)라고 부른다. 가령, 점심 대신 먹으려고 여기 놓아둔 붉은 사과는 개별자이지만, 그 붉은 사과가 가지고 있는 듯 보이는 붉음(redness)과 같은 것은 보편자이다. 이런 보편자는 여러 개별자에 나타날 수 있다. 즉 앞에 있는 사과도 붉고, 소방차도 붉고, 늦은 오후의 태양도 붉다. 각각의 개별자는 붉음이라는 보편자를 가지고 있다.

 

사과, 토마토, 붉은 피망 등은 각각 '개별자'이지만 각각이
가지고 있는 붉음은 '보편자'이다.


한편 개별자가 존재하는 것은 다소 분명하다. 그것은 분명 어떤 시공간의 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으며, 한 번에 여러 곳을 점유할 수 없다. 당신은 지금 어떤 모니터 바로 앞에 앉아 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모니터 뒤에 앉아 있을 수는 없다. 개별자는 한 번에 여러 곳을 점유할 수 없다. 하지만 보편자는 다르다. 붉음이라는 보편자는 책상 위에 있는 붉은 사과에도, 냉장고에 있는 토마토에도 나타난다. 보편자는 동시에 두 곳에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편자의 존재가 의심스러울 수 있다. 하나의 보편자가 동시에 여러 곳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해 있다는 말과 유사하다. 시공간을 초월해 있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유명론이란 그런 보편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개별자 밖에 없으며, 개별자들 사이의 공통적인 것은 오로지(唯) 이름(名)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유명론이다. 이 유명론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오컴이다. 유명론과 관련해서 몇 가지 기억할 만한 것이 있다. 우선 보편자가 시공간을 초월해 있다는 이유에서 오컴은 그 존재를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컴에게 있어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것이 그것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시공간을 초월했음에도 그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있다. 무엇이겠는가?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과 천사들이다. 두 번째로 오컴의 유명론은 검약의 원리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언급할 만하다. 일견 오컴은 자신의 면도날을 이용해서 불필요해 보이는 보편자를 싹둑 잘라 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해다. 오컴은 (검약의 원칙을 따라) 보편자를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은 마음만 먹으면 보편자를 비롯해서 많은 다양한 것들을 존재하게 할 수 있다. 그보다 그것을 상정한 이론 ― 특히 그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둔스 스코투스의 이론 ― 이 정합적이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보편자를 거부한다. 마지막으로 오컴이 보편자의 존재를 거부했다는 것을 그가 보편적인 것에 대한 어떤 논의도 거부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잘못이다. 그는 그런 논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다른 방식으로 보편적인 것을 다룰 수 있다고 여겼다.

 

 

 

 

다소 전문적으로 서술하자면, 그는 온건한 유명론자 혹은 개념론자(conceptualist)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하지만 철학사적으로 그가 중요한 이유는 사실 그의 논리학에 있다. 그의 논리학의 독창성과 영향력은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컴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의 논리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언급하자.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프란체스코 수도사 윌리엄’은 오컴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에코는 사실 윌리엄 오컴을 실제 주인공으로 삼고자 했지만 몇 가지 이유에서 단념했다고 한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과 주인공의 몇 가지 말들로부터 윌리엄 오컴의 흔적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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