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시가 월요일을 제외한 주6회 운행한다. 새만금 방조제 코스와 고군산군도 코스로 운영중이다. 올해부터는 유료다. 그 대신 군산시의 정체성을 살린 근대문화 중심도시의 개발과 근대역사 경관 조성사업 등이 추가될 예정이다.
시티투어버스 참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군산시 문화관광홈페이지(http://tour.gunsan.go.kr)나 관광진흥과(450-6110)로 문의하면 된다. 시티투어 탑승료 19세 이상 성인 5000원, 초·중·고 및 경로·장애인·군인은 2500원이다. 20인 이상 단체의 경우 각각 1000원, 500원씩 할인된다.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근대역사문화유산
군산은 근대문화도시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1899년 5월 1일에 개항된 항구도시다. 다른 개항 항구와는 달리 오직 쌀 수출을 근간으로 하는 일본 상공인들의 경제적 중심지였다. 군산은 일본인들의 도시였다. 호남, 충청의 쌀은 일본으로 강제 수출됐다. 일본의 쌀 부족을 보충했던 역사적 아픔이 군산에 서려 있다. 수탈의 흔적들은 조정래의 ‘아리랑’과 채만식의 ‘탁류’를 통해 그려진다. 과거문화의 자료들을 근거로 근대문화를 사실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현장 체험학습의 장이 많이 있다. 일제시대에는 군산의 인구 중 조선인과 일본인의 비율이 5:5 정도나 됐다. 내항을 중심으로 한 시가지는 대부분 일본인이 주거하는 지역이었다. 현재 원도심(구도심 지역)의 건물 가운데 약 20%는 일제시대 지어진 가옥이다.
금광동에 있는 동국사는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다. 1909년에 창건됐다. 미루어 보아도 이전에도 일본인들이 군산에 많이 거주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동국사는 일본 조동중에서 ‘금강선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군산에 있던 5개의 일본 사찰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다.
동국사에서 해망동을 향해 몇 걸음 옮기면 구 히로쓰 가옥이 있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야쿠자 두목 하야시가 게다를 신고 걸어 나오는 장면이 촬영됐다고 해서 ‘하야시 집’으로 불린다. 이 집은 포목점을 경영해 큰 돈을 번 뒤 군산부의회 의원을 지낸 히로쓰의 저택으로 일본풍의 정원이 아름답다.
월명공원 아래로는 해망굴이 있다. 1926년 10월에 개통된 터널로써 (구)군산시청 앞 도로인 중앙로와 수산업의 중심지인 해망동을 연결하고자 만들어진 반원형의 터널이다. 해망굴에서 산책로를 따라 오르면 월명공원 전망대에서 금강이 서해와 몸을 섞는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다.
내항에 자리한 구 군산세관은 100년 전에 완공(1908년 6월)된 건물.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 등 건축재를 수입해 유럽 양식으로 지어졌다. 내부에는 군산항 개항 이후의 모습과 군산세관의 옛 모습들이 전시되어 있다.
부잔교도 수탈의 상징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커 큰 배들이 부두에 정박할 수 없자 수위에 따라 높이를 자동으로 조절할 수 있는 부잔교를 설치하였다. 1934년에 200만석의 쌀이 이곳에서 실려갔다.
군산간호대학 근처의 이영춘 가옥은 ‘농촌보건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영춘 박사가 40여년을 살았던 집이다. 이 집은 본래 대농장주였던 구마모토의 별장으로 지어졌다. 한국과 일본, 서양식이 모두 가미된 것이 특징이다. 일제시대 최대 규모의 농장이었던 구마모토 농장은 1부 2도 26면에 걸쳐 있었는데, 땅의 규모는 여의도의 40배에 이르고 소작농만도 2만여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구마모토는 소작농의 진료를 위해 이영춘 박사를 불러왔다. 이 박사는 해방 후 구마모토가 물러간 뒤에도 이곳에 남아 농부들을 진료하다 1980년 세상을 떴다.
개정면 발산초교에도 아주 특별한 근대유산이 남아 있다. 이곳은 시마타니라는 일본인 소유의 쌀창고가 있던 자리로 시마타니는 문화재에도 관심이 많았다. 주변 지역에서 수집한 문화재를 금고에 보관했다. 탑이나 석등 같은 규모가 큰 석물들은 금고에 넣지 못하고 정원석으로 활용했다. 그가 수집했던 석등(보물 234호)과 5층 석탑(276호)을 비롯한 20여점의 석물은 발산초교 건물 뒤편에 지금도 남아 있다. 한 켠에는 1930년대에 콘크리트로 지은 3층 규모의 시마타니 금고가 있다. 이곳은 도자기나 서화 등을 보관하던 곳으로 당시 미국에서 수입한 이중 잠금장치가 된 쇠문을 달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