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를 만나요?" 내가 물었다. 그는 한참 회사 이야기에 열을 올리다가 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듯 했다.
"음… 나는 당신처럼 내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친구들을 만나면 다들 각자 이야기하느라 바쁘고 여자친구는 절대적으로 내 편이고……. 당신이 내 이야기에 보여주는 소소한 반응들이 좋아요. 당신은 실제로 내 이야기를 정말 주의 깊게 잘 들어줘요."
아, 그는 그의 이야기가 서른한 살의 여자에게, 그러니까 그 복잡한 직장 돌아가는 이야기나 재수 없는 상사, 불합리한 회사 시스템 같은 것들이 얼마나 힘겹게 지나온 청춘임을 알까. 그 이야기를 듣는 게 버거워서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취기를 빌려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린다는 것도. 그는…… 곧 죽어도 알 리가 없다.
"그러는 당신은, 왜 나를 만나요?"
젊고 건강 하고 대한민국 평균적인 상식을 갖고 있는 20대 '남자'에게 "당신과 섹스는 그리 맞지 않지만
당신의 몸이 그리워요"라고 대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난생 처음으로 남자에게 당신이 필요해요, 라고 말했다.
난 당신이 애인이 있는 게 좋아요. 나에게 연애는 구차하고 지리멸렬하고 결혼 이라는 제도에 끌려들어가고 싶지도 않고 다만…… 육체적인 해소가 필요해요. 당신에게 어떤 죄책감과 책임감 같은 걸 요구하지 않는, 순전히 남자와 여자와의 육체적인 관계만을 바란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래요?
그날 이후 우리는 2주 뒤 다시 만났다. 그가 급격히 술에 취해서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한 거… 남자 입장에서 정말 '쌩유'인 거 알아요? 그런데 왜 당신은 먼저 연락하지 않죠? 문자 한 통 안 보내고. 당신은 가끔 땡기지 않아요? 나는 가끔 당신이 땡기는데……. 걱정 말아요, 나는 절대 (여친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 있어요."
나는 갑자기 그와 자고 싶지 않아졌다. 둘이서 소주 3병에 맥주 두어 캔을 마시고도 여전히 땡기지 않았다.
여자에게는 항상 자기검열이 있다. 내 안의 본능에 충실하고 싶으면서도 '걸레'가 되고 싶진 않다. (남자들이 함부로 여자를 걸레로 말한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와 잤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가 나를 우습게 보거나 함부로 '땡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섹스는 섹스고, 사랑은 사랑이고, 연애는 연애다. 나는 참으로 그렇게 살고 싶지만, 여전히 내 몸은 도덕적 잣대 앞에서 무한히 스스로를 검열하는 걸까. 그래서 그와의 섹스가 재미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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