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지현의 에로틱 칵테일

(18) 좀 놀아본 남자는 위험하다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1. 2. 19. 18:50

(18) 좀 놀아본 남자는 위험하다.

 

같이 잔 여자의 숫자를 셀 수 없다는 남자와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여자를 잘 알고 있는지 자랑처럼 떠들어댔고 나는 그게 편했다. 그에게는 오늘 섹스는 정말 좋았어, 혹은 방금 그건 별로 좋지 않았어 식의 이야기도 별 스스럼없이 할 수 있었다. 그는 내 속내를 본능적으로 알아챘고, 내숭을 떨거나 감추기 위해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베갯잇에서 그가 물어보는 질문들-이를테면 넌 몇 명이랑 자봤니, 감정없이 섹스해 본 적 있니 같은 것들에 약간은 솔직하게 대답했었는데….

나는 그가 정말 좋았다. 그가 얼마나 많은 여자와 잤든 말든 그냥 내 눈앞의 그 남자가 그냥 좋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나는 헤어졌다.

"넌 나와 만나는 중에도 외롭거나 공허하면 또 다른 남자를 만날 거잖아. 낯선 남자가 널 좋다고 하면 그 남자와 잘 수 있잖아."

저런. 그 남자가 솔직했다고 나 역시 솔직했던 게 죄다. 한때 놀아봤으니까 약간의 방황이나 솔직한 섹스, 무의미한 관계 같은 것은 충분히 이해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 뒤의 허무함과 후회, 그래서 정말 '사랑' 앞에서는 두 배 더 노력하고 좋은 여자가 되고 싶은 마음.

오래 전에 본 아침드라마의 한 토막이 떠올랐다. 바람피운 아내 때문에 괴로워하는 남자와 그의 친구가 소주를 마신다. 친구가 먼저 말한다. "너도 바람피운 적 있잖냐. 니 죗값 치르는 셈치고 같이 살아라." 남자가 말한다. "아니, 내가 바람피우지 않았더라면 아내를 용서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바람피우면서 경험했던 그 모든 것들을 내 아내가 겪었다고 생각하면 평생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어."

그의 논리인즉 바람 한 번 안 피워본 사람은 바람나봤자 '가정이 있는 사람인데, 설마 손밖에 더 잡았겠어?'라고 생각하는 반면 제대로 바람피워본 사람은 그들이 어느 시점에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 남자가 나를 못 믿은 건, 나에게서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트에 가서 엮이는 아무 여자와 자고,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라면 아무렇지 않게 밤을 보낼 수 있고, 조금만 외모가 마음에 들면 적극적으로 꼬시고…. 그렇게 한때 좀 놀아본 그는 나를 볼 때마다 자신이 '놀았을' 때 함께 놀았던 참 쉬웠던 여자들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놀아본 남자들은 위험하다. 자신이 놀았던 과거는 합리화될 수 있지만 그 현란하고 천박했던 순간을 내 여자도 경험했다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실제로 그런지 안 그런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남자와 헤어지면서 결심했다. 다시는 남자에게 내 '놀았던' 과거를 이야기하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