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씁쓸한 이별을 했던 옛 남친에게 문자가 왔다. "잘 지내?"
처음에는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숫자 조합. 누구더라, 누구더라…. 헤어질 즈음 혹시 몰라서 적어놓았던 메모지를 찾아보지 않았더라면 하얗고 멀끔한 얼굴의 그 아이일 거라고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여자들이 가끔 참 궁금해하는 남자들의 심리가 있다. 도대체 왜 남자들은 옛 여친에게 연락을 하는 걸까? 연애를 끝낼 때는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말자는 철칙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헤어질 때마다 남자의 전화번호를 지우거나 '받지말것1' '받지말것2' '받지말것3'……으로 저장한다. 이 남자애의 경우는 '받지말것2' 쯤으로 저장돼 있다가 6개월이 지난 후에도 연락이 오지 않기에 아예 전화번호를 지운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옛 여친에게 어느 날 문득 문자나 전화를 거는 그들의 심리가 이해되지 않는다. 미련이 남을 만큼 지독한 연애를 했던 것도 아니고, 서로의 생활에 속속들이 배어 있을 만큼 오랜 기간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 시간 지나고 나니 너만한 여자가 없더라 싶을 만큼 내가 '좋은 애인'이었던 것도 아니고, 그들이 먼저 헤어지자고 한 것도 아니니 미안하거나 죄책감이 남을 리도 없고, 더 심한 경우 그들이 현재 만나는 또 다른 여친이 있을 때도 있다. 그런데 도대체 그들은 왜 연락을 하는 것일까.
잘 지내? 이 '간 보는' 어정쩡한 문자질이라니. 그러고 보면 그의 속내는 빤하다. 어영부영 잘 지내, 라고 답문 보내줬다가는 어떻게 잘 지내니, 라는 답문 올 테고, 이내 언젠가 술 한잔 하자, 라는 문자가 오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술 한잔 하게 되면 술김에 여차저차 '자고 갈까'라는 얘기가 나올 테고 그러고 나면 우린 옛 생각 하면서 몸을 섞겠지.
사실 섹스로만 치면 그는 내 인생에 베스트 3 안에 꼽힌다. 유난히 잠을 설치는 밤이면 그와의 참 좋았던 섹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 그때 그 아이는 나를 이렇게 만져주었었지, 그가 내 안에 들어오던 순간은 유난히 짜릿했었지, 그러고 나면 나도 문득 그에게 연락하고 싶어졌다. 한때 사랑하던 사이, 내 몸을 속속들이 아는 남자라면 재고 계산하고 또 내가 헤프게 굴진 않았는지 자책할 필요도 없이 오늘 하룻밤의 욕정은 달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에잇, 욕정에 자존심을 팔 순 없지, 하면서 억지로 이불을 똘똘 껴안고 잠들지 않았던가. 외로운 하룻밤을 충족시키기 위해 지나간 시간에 난도질하는 행동, 이별할 때보다 더 뻘쭘하고 민망한 다음날 아침. 내가 그에게 전화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런 것들 때문이었다.
나는 오늘 잠시 고민했다. 자존심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간만에 섹시한 밤을 택할 것인가. 어쨌든 간에 내가 먼저 연락한 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아직 문자를 지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