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지현의 에로틱 칵테일

(66) 그 남자와 자지 않은 이유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1. 2. 21. 18:12

(66) 그 남자와 자지 않은 이유?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은 그는 평소답지 않게 급하게 술을 마셨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천천히 마셔" 하던 우리는 이내 다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근 1년 만에 대학 선배들과의 만남. 그것도 한 선배의 결혼 소식이 아니었다면 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을지 모른다. 술자리는 즐거웠다. 연애 3개월 만에 결혼하는 노총각 선배를 놀리는 것도 즐거웠고, 애 둘 딸린 유부남으로 살아가는 고충을 털어놓는 다른 선배의 하소연도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였다!

사실 그와 나는 6년 전 잠시잠깐 연애했었다. 사귀는 동안 딱 세 번을 잤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 나는 누군가를 사랑했다가 헤어졌다 또다시 사랑에 빠졌고, 그는 결혼하고 싶은 여자와 진지하게 연애 중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우리는 더 이상 헤어진 연인이 아닌 편한 선후배 사이가 되었고 앞으로도 우리는 그렇게 잘 만날 것 같았다.

1년의 시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는 이토록 달라진 것일까. 급속도로 취한 그는 내 곁에 바투앉아 내 머리를 느끼하게 쓰다듬고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다른 선배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 사람 많은 술집에서 키스를 시도하는 것이다! 연애할 때는 유난히 수줍음 많은 그였다. 남들 앞에서 절대 스킨십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가 다른 선배들이 눈치챌 만큼 몸으로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나왔는데 그의 주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굳이 차까지 쫓아와서는 "집에 가지 마라, 같이 있고 싶다" 조르는 것이다. 한때 사랑하던 연인, 몇 번 섹스도 한 사이, 그리고 나는 남자를 끊은 지 몇 개월째...... 약간의 술도 마셨겠다, 하룻밤 섹스야 뭐 어쩌랴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나는 한사코 그를 뿌리치고 혼자 차에 올랐다.


그날 밤, 나는 그가 참으로 불쾌했다. 내가 사랑했던 순수하고 진지했던 그 남자는 어디로 갔을까.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의 나이 삼십대 중반,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와 헤어지고 난 뒤 그는 몸서리칠 만큼 몸이 외로웠을지 모른다. 술에 취하자 한때 몇 번 섹스했던 내가 만만해 보였을 수도 있다. 혹은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직장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술자리에서 여자 꿰차고 2차 나가는 습관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날 그와 자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여자'와 자고 싶었던 것이지 '나'와 자고 싶었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최소한 한때 사랑했던 남자에게 그런 식으로 이용되고 싶지 않았다.

여자로 하여금 섹스할 수 있게 하는 힘은 두 가지다. 너무나 갖고 싶은 섹시한 남자, 혹은 진심으로 나를 갖고 싶어하는 순수한 남자. 음흉한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남자, 자신의 쾌락을 채우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는 남자, 그리하여 다음날 아침 '간밤에 무슨 짓을 한 거야!' 하며 후회하게 만드는 남자는, 어지간히 굶주리지 않은 이상 재미없다.

그나저나 또 다른 선배의 결혼식은 돌아오는 토요일.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