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지현의 에로틱 칵테일

(78) 감정 없는 하룻밤에도 예의는 있다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1. 2. 21. 18:30

(78) 감정 없는 하룻밤에도 예의는 있다.

얼마 전 텔레비전 리모컨을 돌리다가 우연히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를 보았다. 영화 속에서는 원나잇스탠드한 남녀가 아침에 눈뜬 뒤 "친구들이 브런치 먹으러 오기로 했으니 그만 가줄래?"라고 말하는 장면이 몇 번에 걸쳐 나왔다. 원나잇스탠드 혹은 감정 없는 섹스가 우리보다 훨씬 일상화되어 있는 외국에서는 사랑할 가능성은 없고 맨 정신으로 얼굴 마주하고 대화할 자신이 없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나 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실 하룻밤 술에 취해 혹은 분위기에 취해 한 침대에 빠져든 남녀가 그 다음날 뽀송뽀송하고 맑은 정신으로 얼굴 마주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그런 게 두려워서 섹스 후 알아서 집에 가주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술에 취해서든 집에 가기 귀찮아서든 우리 집에서 머문 남자 곁에서 깨어난 날에는 그렇게나 난감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쿨하게 "친구들이 브런치 먹으러 오기로 했으니 그만 가줄래?" 같은 말은 죽어도 나오지 않는다. 도대체 왜 여자들은 같이 잔 남자들에게 마음이 약해지는 것인가!

남자가 깰세라 몰래 출근했다가 반차를 쓰고 집에 돌아와서 해장국을 사먹인 적도 있고, 주말의 약속을 취소하고 자장면과 짬뽕을 시켜먹으며 하루 종일 시간 때워준 적도 있다. 출근 시간에 늦었음에도 굳이 배웅하여 택시 태워 보낸 적도 있다. 그토록 집에 안 가는 남자들을 보고 “이 남자, 혹시 나한테 진짜 마음 있나?”라고 착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남자들 모두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나로서는 그들을 사랑했던 것도 아니요, 다시 만나고 싶어 안달 냈던 것도 아니다. 그저 하룻밤 같이 잔 남자에 대한 예의와 배려, 혹은 여자들만 가지고 있다는 ‘몸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룻밤 같이 잔 여자가 베푸는 과도한 친절에 그들이 얼마나 불편하고 부담스러웠을지도 이해 못 할 바 아니지만, 알아서 떠나주지 않는 그 남자들에 대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정 없는 섹스 이후에 서로를 대처하는 자연스러운 방법도 좀 배워야 할 것 같다. 열렬히 사랑해 마지않던 애인과의 첫 밤이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미숙하지만 잔뜩 설레고 떨리는 섹스 이후 서로 꼭 껴안고 부비적거리며 자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곁에 있어서 너무나 행복한 남자와, 너무나 당황스러운 남자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나이트나 클럽에서 만난 여자와의 섹스 이후, "다음날 눈을 떴는데 아무도 없더라, 정말 깔끔하고 좋더라"고 말하는 남자들을 몇 명 본 적 있다. "친구들이 브런치 먹으러 오기로 했으니 그만 가줄래?"라고 말하는 것이 민망하고, 듣는 것도 자존심 상해 하는 우리 사회에서라면, 쪽지 하나 남기고 사라지는 예의가 가장 적합한 게 아닐까. 아무리 몸이 피곤하고 늘어지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