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지현의 에로틱 칵테일

(97) 유부남과 싱글, 외로움이 죄다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1. 2. 21. 18:59

(97) 유부남과 싱글, 외로움이 죄다.

 

딱 13년 동안 알고 지낸 선배. 12년 전에는 내가 여자로서 그를 좋아했으나, 그는 내가 마악 감정을 표현하려고 할 때 결혼을 했고, 그 이후부터는 별다른 미련도 없이 가끔씩 만나서 술 한잔 하면서 인생사를 나누는 좋은 선배가 되었다. 거기에 외주처로 같이 일하게 되면서 더 자주 만나고 더 자주 메신저로 일상을 묻는 든든하고 현명한 좋은 선배였다.

나도 취했고 그도 취했다. "너 오늘따라 되게 예뻐 보인다." 이런 말에 호호호 웃으며, 내가 원래 예뻐 하면서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눌 수 있는 상태였다. 그는 유부남이고, 심지어 그의 와이프도 알고, 그는 오래된 좋은 선배고,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 같이 일하는 파트너니까.

정말 깜짝 놀란 건, 그가 택시 안에서 내 손을 잡아왔을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했던 것 같다. 그래, 살다 보면 힘들고 외로우니까. 따뜻한 손이 그리울 때도 있겠지. 이렇게 좋은 선배, 손 한번 빌려주면 뭐 어때, 내 손이, 그에게 위로와 힘이 된다면…… 그래서 그냥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그가 내 집 앞에서 조심해서 잘 들어가라는 데도 억지로 따라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허그, 그 다음에 키스 시도.

악. 나는 정말 그를 격하게 뿌리치고 집으로 내달렸다. 이건 아니잖아. 나는 10여 년 전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를 이성으로 좋아해본 적 없고, 맘 잘 통하니까 '오빠, 요새는 정말 외로워. 이제 나 좋다는 남자도 없어' 하소연하고, 그의 말도 안 되는 고민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주었다. 그렇다고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과 잘 수 있는 여자는 아니란 말이다!

그는 그날 밤 내내 전화를 걸어왔고, 이 상황이 참을 수 없이 당황스럽고 민망했던 나는 참다 못해 전화기를 껐다. 나는 진심으로 슬퍼졌다. 나는 10년 동안 나를 지탱해왔던 좋은 사람을 잃었다.

그는 다음날 후회와 반성에 가득 찬 이메일을 보내왔다. 역시 외로움이 문제다. 10년 가까운 결혼 생활, 식상해진 부부 관계, 일에 대한 스트레스, 아직은 남자이고 싶은 마음. 한때 자신을 좋아했던, 이야기 잘 통하고 편안한 여자 후배…….

그 모든 게 그 밤, 술기운에 폭발했겠지. 그 마음을 모를 것도 없다. 나도 외롭다. 그리고 몸처럼 사람의 외로움을 급히 충족시켜주는 게 없다. 나에게는 애인이 없고, 사랑할 사람이 없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없다. 누군가 마주 앉아 내 말에 귀 기울이고 웃어주는 순간, 그게 누구든 간에 심장 떨리지 않을 리 없다. 그 순간에는 완벽하게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드니까.

그가 그날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은 건,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결혼 안 한 삼십대 싱글이라는 이유로 내가 이렇게 이용당해도 되는 거야? 내가 그렇게 만만해?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불쾌한 상황을 경험해야 하는 거야? 분노하면서도 또 나름 그를 이해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결국 외로움이 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