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지현의 에로틱 칵테일

(98) 배고프다고 아무에게나 연락하지는 말자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1. 2. 21. 19:00

(98) 배고프다고 아무에게나 연락하지는 말자

"그래서 남자 안 만날 거야?" "실연의 상처는 다른 남자로 잊는 게 제일 좋아."

내 이별 소식을 들은 지인들이 한마디씩 덧붙인 탓이 크다.

이별의 후유증으로 나는 요새 까칠함의 극을 달려 자타공인 히스테리컬한 노처녀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반복하고 반복해도 이별은 여전히 힘들다.

이제 삼십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나를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말해줄 남자가 다시 나타날까,

일주일에 두어 번 나를 꼭 안아주고 뜨겁게 키스해줄 사람을 만날 수 있긴 할까,

 

예쁜 속옷을 갖춰입고 데이트에 나간다거나 일요일 낮 뒹굴거리며 서로의 몸에 장난을 치다가

갑자기 불붙던 뜨거운 섹스를 또 할 수 있을까.

이런 복잡한 마음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그래, 아무 남자라도 만나보자' 싶었을지 모르겠다.

 

열흘에 한번씩 술 먹자고 조르는 S군? 그와 나는 두어 시간 즐겁게 취할 순 있겠지만

남의 남자와 잠드느니 홀로 잠드는 게 더 좋다. J군은 내 연락에 덥썩 달려올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다정하게 내 몸을 쓰다듬던 그는

그후 오랫동안 전화 한 통 없는 '나쁜 남자'임을 이미 경험상 안다.

 

K군은 내 우울하고 암울했던 하루를 깡그리 잊을 만큼 몇 시간 동안 나를 웃겨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와는 키스하고 싶은 마음도 자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리하여 만만했던 게 그 남자였다.

 

한 2년 전, 몇 번 술자리에서 마주쳤고 하루에 몇 번씩 문자를 주고받았으나

유야무야 관계가 진척되지 않았던 그 남자. 그는 정말 소주를 잘 마시고,

술자리 내내 말없이 안주만 먹는 남자였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대학원생이었고,

우리 사이에는 왠지 모를 성적 긴장 같은 게 항상 있었다.

 

"잘 지내요?" 물음표 문자를 내가 먼저 보냈고 "언제 한번 봐야죠!" 느낌표 문자는 그가 보냈다.

그리고 그 문자에 용기백배하여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뭐 하고 지냈어요, 잘 지냈어요,

아직도 학교 다니나요, 졸업했어요, 여전히 바쁘시죠, 아니요, 요새는 별로 안 바빠요, 결혼 안 하세요?

아, 그러게요, 좋은 사람이 안 나타나네요, 그리고는 침묵.

 

그 어색하고 공허한 통화는 채 3분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 한번 봐야죠!" "그래요 우리 꼭 봐요!"

둘 중 누구도 지키지 못할 우리의 거짓말. 아무래도 나는 전화를 걸지 않았어야 했다.

 2년 전 내가 먼저 연락을 끊은 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한번쯤 자보고 싶지만 이성적인 호감은 생기지 않는,

대화는 묘하게 어긋나고 관심이나 취향도 맞지 않는 남자와

이도 저도 아닌 관계를 지속하는 건 소모적이야'라고 나는 판단했을 것이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 역시 그를 사랑할 리 없다.

그는 그때보다 훨씬 살이 쪘다고 하고, 나는 그때만큼 하얗고 곱지 않다.

아마도 그의 머리는 더 벗겨졌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명확해졌다.

 

나는 어떻게든 실연의 상처를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 남자를 만난다고 그 상처는 치유되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진심으로 남자가 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특히 이러한 형태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