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현의 에로틱칵테일] (115) '번쩍' 하는 황홀한 순간
고교 시절 물리 시간이었다. 우리가 멍한 표정으로 칠판만 바라보고 있자 선생님이 교과서를 덮으며 말했다.
"내가 예전에 고향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한 여자를 만났는데 말이다……." 우리는 드디어 첫사랑 이야기를 들을 거라 기대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생님을 주목했다. "마침 옆좌석에 하얗고 예쁜 여자가 하나 앉아 있는 거야. 너무 참해서 가는 내내 긴장을 해서 잠도 안 오고 그렇다고 말 걸 용기는 안 나고. 보아하니 그녀도 젊은 남자가 옆에 앉아 있으니 계속 불편해 하면서 의식하는 듯하더라고. 드디어 용기를 내어 휴게실에서 커피를 하나 사서 그녀한테 내밀었지. 그런데 여자가 손을 뻗어서 음료수를 잡는 순간 버스가 흔들리는 바람에 손이 확 닿은 거지. 그때 반짝, 하고 우리 둘 사이에 전기가 튀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정작 그는 싱거운 표정으로 "뭐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둘 다 너무 당황해서 다른 쪽만 바라보고 있다가 서둘러 내려버렸지 뭐." 하며 그는 전기에너지에 대한 수업을 이어갔다. 로맨틱한 첫사랑 이야기를 기대하던 우리는 실망의 야유를 보냈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는 학생들이 지루할까봐 선생님들이 이야기해주곤 하던 첫사랑, 첫 연애, 첫날밤 이야기와는 좀 다른 느낌으로 내게 기억됐다. '번쩍~' 하고 전기가 통하는 순간. 남자와 여자의 긴장과 성적 에너지가 팽팽하게 이어지다 동시에 맞부딪혀 화학적 작용을 일으키는 절묘한 순간. 과연 그런 건 어떤 느낌일까?
내 이상형도 아니고 성격이 잘 맞는 것도 아니고 친한 사이도 아님에도, 이상하게 끌리는 남자가 있다. 얼마 전 한 모임에서 알게 된 남자. 말을 제대로 나눈 적은 없었지만 우리는 술자리에서 종종 시선이 마주쳤고 그의 눈길이 닿을 때마다 이상하게 긴장이 되곤 했다. 어느 비 많이 내리던 새벽, 우리는 마침 한 우산을 쓰게 되었다. 나는 낯선 남자와 한 우산을 쓰는 게 어색하고 긴장돼 그의 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걸었다. 내 웃옷은 바람과 함께 내려치는 빗물에 잔뜩 젖어들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그가 확 나를 자기 어깨로 끌어안았다. 앗. 바로 그 순간, 마주 닿은 살갗에 '번~쩍' 하고 전기가 튀는 것이 아닌가! 참 묘하게도 그건 나만의 일방적인 느낌이 아니어서, 우리 둘 다 당황해서 말을 잃었다.
물리 선생이 말했던 그 느낌이 바로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번쩍, 번개라도 맞은 느낌, 몸의 중심이 땅끝까지 뚝 떨어지며 피부세포가 발끝부터 한꺼번에 일어서는 느낌. 당장이라도 고개를 돌리면 열정적인 키스, 혹은 그 이상을 할 수 있을 것 같이 온몸이 달아오르는 심정, 머릿속이 아득해지면서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인생에서 꽤 적지 않은 연애를 했던 나로서도 낯설기만 한 이 로맨틱한 느낌은, 남녀 사이에 쉽게 찾아오기 힘든 느낌인 건 분명하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낯선 남녀가 동시에 감정적 호감을 품고 있어야 하며, 또 동시에 성적으로 끌려야 하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아주 작고 내밀한 스킨십이 오가야 한다.
그날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 하지만 예감이 든다. 다음에 우리가 다시 만나면, 그때는 아무 일 없이 헤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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