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에 발걸음을 들이기 전, 잠시 북촌에 대해 알고 가자. 요약하자면 대략 이러하다. 북촌은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에 자리한다. 삼청동, 가회동, 원서동, 계동, 안국동, 송현동, 사간동 등을 포함한 지역을 일컫는다. 청계천을 경계로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계천 남쪽에 자리했던 남촌이 하급관리들과 가난한 선비인 딸깍발이들의 주거지였다면 북촌은 상류층 양반들의 주거지였다. 북촌은 예로부터 볕이 잘 들었고 지하수가 풍부했다고 한다. 배수도 잘 됐다. 게다가 도성의 중심에 있어 왕실의 종친과 힘깨나 쓴다는 세도가, 벼슬아치, 팔도 각지에서 올라온 양반들이 모여 살았다. 그들의 대저택과 그들이 부리던 하인이 기거하는 크고 작은 집들이 세워졌다. 하지만 조선조가 막을 내리면서 북촌의 영화도 시들었다. 왕조가 무너지면서 세도가들은 몰락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자 대규모 식솔을 유지하기도 힘들어졌다. 어쩔 수 없이 하인과 식객을 내보내야 했고 물건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북촌 앞 우정국 주변에 골동품 매매 상점이 하나 둘 생겨났는데, 이것이 인사동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북촌 일대에는 900여 채의 한옥이 있다. 한때 3,000여 채가 넘는 한옥이 있었다고 하지만 양옥과 다세대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그 수가 크게 줄었다. 사실 가회동 인근을 걸으며 만나는 한옥 대부분은 1930년대를 전후해서 들어선 것들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고관대작들이 살던 북촌의 대저택들 대부분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중·소규모의 한옥들이 들어섰다. 당시 주택건설업체였던 ‘건양사’에서 서민들이 살기 적합하도록 대지를 매입해 30~60평짜리 한옥을 지어 분양한 것들이다. 각각 5000여 평, 2700여 평에 이르던 가회동 31번지, 26번지도 이 시기에 소규모 필지로 분할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한옥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가옥 구조 역시 폐쇄적으로 바뀐 건 어쩔 수 없다. 가회동 한옥의 대부분은 벽체와 벽체를 잇대고 있다. 골목 쪽으로는 대문과 창만을 보여준다. 지붕 역시 ㄷ자 형태. 솟을대문과 중정(안채와 바깥채 사이의 뜰)이 사라진 자리에는 좁은 마당과 펌프 시설이 들어섰다. 이른바 ‘집장사’들이 한옥을 집단 건설하면서 생겨난 형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