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취미생활 여행

부암동 능금나무길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1. 10. 18. 11:53

가을, 비로소 가을이 왔다. 오지 않을 것 같던 가을이 훌쩍 와서, 그리고 가을은 어느새 깊어서 산자락마다 단풍을 들게 하고, 길에 낙엽을 흩날리게 하고…… 하지만 가을은 노루꼬리 마냥 짧기만 해서, 언제 가버릴지 몰라 마음을 애태우고, 안절부절 못하게 한다. 가는 가을이 마냥 아쉬운 분들께, 만추를 즐기고 싶은 이들께 부암동을 권해드린다. 작지만 예쁜, 가을 산책을 즐기기 좋은 골목길이 있다. 연인과 함께 팔짱을 끼고서, 아이의 손을 잡고서, 아내 혹은 남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느린 걸음으로 걷는 게다. 한나절 기분 좋은 가을 산책을 즐기는 게다. 골목길에는 명주실처럼 환한 가을볕이 흘러 넘치고 담벼락에는 붉은 단풍잎과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다. 밟을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귀를 간질이는 소리를 낸다. 분위기 좋은 카페도 여럿 있다. 꼭 한 번 걸어보시길. 길 이름도 예쁘다. 무계정사길, 약수터길, 능금나무길이다.

종로구 부암동 지도 보기

  • 1 넝쿨에 뒤덮힌 담벼락과 좁은 오르막길이 부암동의 고풍스러움을 더한다.
  • 2 오래되고 낮은 상가들이 행인을 반긴다. 부암동은 서울 한복판의 '서울 같지 않은 동네'다.
  • 3 부암동 사람들은 70년대에 공들여 지은 첨단 주택을 아직까지 관리·유지하며 살아간다.
  • 4 오래된 흔적 사이로 끼어든 현대적 터치들이 부암동 특유의 무심한 조화를 만들어낸다.

 

 

 

편한 마음으로 걷기 좋은 길

그냥 놀러 간다고 생각하자. 스니커즈 뒤축을 구겨 신고 가을 어느 오후를 어슬렁거리는 거다. 골목이 우리에게 주는 잠언, 미학적 충고 등등은 잊어버리자. 그냥 맘 내려놓고 즐기는 거다. 택시를 타도 되고 녹색 마을버스를 타도 된다. 내려야 할 곳은 부암동 주민센터 앞. 오른쪽으로는 인왕산 비탈을 따라 이어지고 왼쪽으로 낮은 집들이 서 있다. 광화문에서 30분 밖에 걸리지 않는, 여기는 분명 서울 한복판이다. 부암동은 이곳에 부침바위가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작은 돌을 대고 자기 나이만큼 문지르면 돌을 떼는 순간 바위에 돌이 붙고 아들을 얻는다는 전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로확장으로 없어졌다고 한다.

 

골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큰길인 자하문길을 가운데 두고 무계정사길 시리즈가 펼쳐지고 길 건너편으로 백사실 계곡으로 향하는 능금나무길, 환기미술관길, 백사실길 시리즈가 나온다. 두 길의 분위기는 딴판이다. 백사실 계곡으로 향하는 길은 무계정사길에 비해 좀 세련됐다. 고급스럽다.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이선균의 집으로 등장한 산모퉁이 카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Art for Life’이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도 있다. 동양방앗간, Art for Life, 산모퉁이가 길을 따라 차례로 나타난다. 한가로운 주택가와 카페들을 지난다. 능금나무길 주택에는 담쟁이넝쿨이 참 많다. 붉게 물든 담쟁이넝쿨이 만추의 낭만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삼청동과 비슷한 분위기이지만 왜지 더 포근한 느낌을 들게 하는 건 왜일까. 아마도 자연과 어우러져 있어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부암동에서는 카메라를 든 젊은이들이 골목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는 것도 쉽게 볼 수 있다. 요즘 골목마다 디지털 카메라를 든 이들을 쉽게 볼 수 있지만 부암동에서는 필름 카메라를 든 이들이 유독 많은 것 같다. ‘로모’, ‘홀가’와 같은 토이 카메라에서 ‘콘탁스’, ‘라이카’, ‘야시카’, ‘롤라이’ 등 클래식 카메라를 든 이들도 자주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부암동에는 왠지 필름 카메라가 잘 어울릴 것도 같다. 주택가를 지나면 울창한 숲이 펼쳐진다. 백사실 계곡이다. ‘오성과 한음’의 주인공 이항복의 별장이 있던 곳이다. 계곡에는 단풍이 진하다. 바람이 불면 숲이 흔들린다. 여름에 왔다면 발 담그고 두세 시간 보내기 좋겠다.

 

 

옛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골목

백사실 계곡을 따라 오르면 부암동 끝자락이다. 그린벨트와 군사보호구역에 묶이고 북악산길로 단절되어 있다. 예전에 능금나무가 많이 아직도 능금나무골로 부르는 이들이 많다. 지난 2007년 도롱뇽이 발견됐다고 야단법석을 쳤던 적도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도롱뇽이 없어지면 그게 뉴스”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무계정사길은 능금나무길과는 딴판이다. 능금나무길이 세련됐다면 무계정사길은 옛 골목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20~30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을 정도다. 면적은 넓지 않지만 골목은 제법 깊다. 구불거리며 달아가는 좁은 길도 있고 제법 가파른 계단도 많다. 오래된 양철 대문과 나무틀 창문이 어울려 옛 풍경을 빚어내기도 한다. 벽에 귀여운 낙서가 그려진 곳도 있다. 아기자기한 맛이 넘쳐난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이런 골목이 남아있다는 것이 새삼 고맙다.

무계정사길을 천천히 걸어본다.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길, 마음을 내려놓게 되는 길이 있다. 무계정사길이 꼭 그런 길이다. 길을 걷다보면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 강요하는 것들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높은 담장 너머로 빨갛게 익은 홍시를 매단 감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고 그 아래로 조그만 아이들이 웃음소리를 떨어뜨리며 뛰어간다. 여기저기서 새소리가 후드득 날아와 발치에 내려 앉는다. 감나무 잎사귀를 흔들고 가는 바람소리…… 감나무 아래에서 문득 생각한다. 어릴 적 살았던, 아무도 없었던 집의 오후와 마루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귀뚜라미, 가을햇살이 내려앉던 마루는 따뜻했고 마당의 빨래는 무심하게 말라가고 있었지. 무계정사길은 이런 소소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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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1997년 계간 <문학동네>에 시 '밀물여인숙'을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시집 [단 한 번의 사랑]을 펴냈다. 일간지와 여행 잡지에서 여행 담당 기자로 오랫동안 일했다. 여행사진 에세이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과 [구름 그림자와 함께 시속 3km]를 펴냈다. 지금은 시를 쓰고 음악을 들으며 자유롭게 여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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