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찾아요?” 골목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다가와 물어보는 아주머니 말씀에 ‘쪽방에서 자려면 어떻게 해야지?’ 하던 이제까지의 걱정들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좋은 방 있는데...” 하며 모여드는 아주머니들 사이를 뚫고 더 안쪽 골목으로 들어간다. 2층짜리 오래된 쪽방들이 모여 있는 곳, 몇 년 전 실측을 하면서 봐두었던 골목이다. 집 앞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용기를 내어 말을 건넨다. “방 있나요?” | |
돈의동 쪽방골목 지도 보기
돈의동 쪽방의 내부. 어느 집 1층 주인방에서 입구 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하룻밤 방값 7,000원
작은 방이라서 하룻밤에 7,000원이라고 했다. 사다리 같이 급한 계단을 오른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은 사람의 무게를 온몸으로 버티며 힘겨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섰다. 삐딱하다. 폭 52cm짜리 문부터 벽면과 나란하지 않다. 정면으로 TV가 놓인 선반이 보이고, 그 위에는 신문지가 깔려 있다. 신고 온 신발을 들여다 놓으라는 뜻이다. 안으로 들어오면서 받은 얇은 수건과 물통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방바닥은 이불에 덮여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문을 닫는다. 문고리를 걸고, 문틀에 매달린 긴 못을 끼워 놓는다. 안에서만 잠그고, 밖에서 열고 닫는 문. 열쇠는 따로 없다. 선반 밑으로 다리를 넣어 몸을 뻗는다. 반대쪽 벽에 베개를 붙이니 머리 위치가 딱 들어맞는다. 난방이 되고 있는지 바닥은 생각보다 따스했다. “ㅋㅎㅓ-,ㅋㅎㅓ-” 다른 쪽방에서 탁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몸을 뉘인 이곳, 바로 ‘돈의동 쪽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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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쪽방 바닥에 누워 천장을 향해 찍은 사진. TV와 선반, 옷걸이가 전부이다.
- 2 직접 묵었던 쪽방 내부를 스케치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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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과 ‘도야’ 그리고 쪽방골목의 진기한 풍경
‘하나로 온전한 방이 쪽이 나서 나뉘게 되었다’는 쪽방은 그 말 속에 제대로 된 방이 아니란 의미가 숨어있다. 우리의 쪽방과 같이 그날그날 하루치 방세를 내고 묶는 간이숙소를 일본에서는 ‘도야’라 하는데, 흥미로운 점은 도야는 숙소라는 뜻의 ‘야도-宿’를 거꾸로 말한 것이란 사실이다. 집이 집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니, 쪽방이나 도야 모두 어려운 삶을 사는 가난한 이들의 애환과 해학이 담긴 이름이라 하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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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골목에서 바라본 돈의동 쪽방골목의 안쪽.
- 2 간단하게 만든 2층 나무난간과 발코니 공간. 쪽방집의 원래 모습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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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은 2.5㎡에서 4.0㎡의 한 평 안팎의 크기를 하고 있다. 한 사람이 누울만한 길이에, 두 사람이 있으면 모로 누워야 할 정도의 폭이다. 비좁은 방 크기 말고도 화장실이나 욕실 등의 편의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1994년에 쓰여진 관련기사를 보면, 돈의동 판자촌 전체에 변기가 3개 밖에 없어 아침마다 긴 줄이 섰다고 적혀 있다. 그때와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집집마다 골목 쪽으로 화장실과 창고, 보일러실 등의 설비공간이 나와 있다는 점이다. 1층 앞을 막고 들어선 화장실, 샌드위치 패널로 마감한 창고나, 2층에 뜬금없이 걸려있는 나무선반과 그 위에 놓인 전기밥솥, 꾸부렁꾸부렁 건물을 타고 올라가는 보일러 연도들의 모습은, 어쩐지 뒤에 있어 보이지 않아야 할 것들이 앞으로 나오고, 안에 있어야 할 것이 밖에 나와 있는 진기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 |
돈의동 골목과 쪽방 배치도.(2006년 10월 조사)
‘쪽방골목’으로 통하는 4개의 출입구와 옛길
현재 돈의동 쪽방골목에는 3300㎡(1,000평) 정도의 땅에 90채의 건물과 781개의 쪽방 그리고 74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자료제공: 종로쪽방상담소 ‘돈의동 사랑의 쉼터’) 동쪽으로 돈화문로와 가깝고, 종로3가역, 단성사와 피카디리 극장도 코앞인 그야말로 시내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쪽방골목을 찾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모두 4개의 출입구가 있지만 그 어떤 출입구도 길에서 시원하게 내다보이는 곳이 없이, 묘하게 꺾어 들어오는 구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하여 신기한 것은 1912년 지적원도의 옛길을 돈의동 골목에 얹어 보면, 쪽방골목은 원래 하나로 된 큰 땅으로, 돈화문로 옆 피맛길을 비롯한 옛 골목들과 네 곳에서 만나는데, 지금도 이 위치들은 돈의동 쪽방골목의 출입구로 그대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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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쪽방 골목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오래된 한옥 골목.
- 2 남쪽 입구에 있던 암자. 현재 건물은 사라지고, 암자는 쪽방골목 안으로 들어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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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동 쪽방의 형성과정
그럼 돈의동 쪽방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시작은 ‘시탄시장’ 또는 ‘동관나무장’에서 비롯된다. 이전부터 시탄(柴炭), 즉 땔나무와 숯을 팔던 시장은 1920년 12월 일제 경성부에 의해 ‘돈의동 시탄시장’이란 이름의 공설시장이 된다. 짐작하건대, 땔나무를 산더미처럼 씰은 우마차들이 좁은 골목을 지나 시장으로 들고 났을 것이다. 하지만 1936년 4월, 도시 중심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시장은 문을 닫고,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는다. 그 후 ‘종삼’이라 불리는 도심의 거대한 사창지역에 속하다가, 1968년 9월 ‘나비작전’이란 매춘소탕작전이 벌어지고, 하루 아침에 아가씨들이 살던 집과 가게들은 모두 빈집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 빈집들이 바로 쪽방으로 변화한 것은 아닌 듯하다. 쪽방에서 만난 주민의 말씀으로는, 그 후에도 아가씨들을 지방에 소개하는 인력소개업이 이어지다가, 그마저도 못하게 하여 70년대에 들어 일용직 근로자,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머무는 쪽방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 |
오래된 목조 2층의 쪽방집의 실측 도면.
공간적인 시각에서 볼 때,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다. 하나는, 일제시대부터 이 지역에 2층 목조주택이 들어서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해방 후 사창가로 전락하기 이전에도 주변의 ‘명월관’을 비롯, 색주집이 발달하여 인근 지역을 ‘기생부락’이라 할 정도였기에 일제시대부터 밀집된 형태를 이루었으리라 짐작해본다. 또 다른 의문은 방이 이렇게 나뉘게 된 시점이 언제부터인가 하는 점이다. 사창가 혹은 보다 이전부터 매춘 등을 위한 공간으로 방이 나뉘었던 것인지, 아니면 6~70년대에 일세방을 늘리기 위해 방을 나누어 쪽방을 만든 것인지, 이를 파악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 |
진화하는 쪽방
2006년 10월 일본팀과 같이 돈의동 쪽방을 처음 실측할 수 있었다. 그 때 이미 일본팀들은 돈의동, 영등포 등 우리 쪽방촌에 대한 조사를 과거에도 몇 차례 진행해온 상태였다. 우리 팀은 모두 3채의 쪽방을 실측하였는데, 2채는 목조2층, 다른 한 채는 벽돌로 쌓아올린 3층 건물이었다. 같은 쪽방이지만 오래된 2층 건물은 1층 한 곳밖에 화장실이 없고, 2층 전면에 창고와 같은 발코니가 붙어 여러 물건들이 복잡하게 쌓여있는 반면, 새로 고친 3층 건물은 각 층마다 화장실을 확보하고, 전면에는 발코니나 창고가 없이 면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새로 지은 만큼 쪽방 하나의 크기나 복도의 폭 등은 약간 더 협소하고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작은 세계 속에서도 쪽방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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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목조로 지은 2층 쪽방의 내부. 장기 투숙을 하는지 빨래를 한 청바지가 걸려있다.
- 2 새로 고친 쪽방의 내부. 한결 깨끗해졌지만, 방 크기나 복도는 더 협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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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 최후의 전선
쪽방은 적막했다. 모두가 잠자리에 든 듯, 12시를 넘겨서는 TV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누워있는 방 하나 말고는 누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거실도 부엌도 없다. 공간만이 아니다. 거주민 대부분은 가족과 단절되거나, 아예 가족이 없는 홀홀 단신의 사람들이다. 쪽방만큼 그 안에 사람들도 고립되고 부족한 사회적 관계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새벽, 누군가 계단 아래 수돗가에서 조금씩 물을 받아 씻고 있다. 5시도 되기 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선다. 공사현장이나 인력시장에 나가는 것이리라. 나 역시 방을 나선다. 전날 복도에 흩어져 있던 슬리퍼들이, 각 방 문턱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나가면서 모두들 정리를 하고 간 까닭이다. 보이지 않는 이곳 사람들 사이의 배려가 느껴졌다. | |
새로 고친 벽돌조 쪽방건물의 내부 도면.
쪽방은 작은 동네를 이루고 있다. 가게도 4개나 있으며 세탁소, 선교회, 약국에 외국인 유스호스텔 그리고 조금 떨어져 ‘돈의동 사랑의 쉼터’ 종로쪽방상담소도 10년 전부터 자리 잡았다. ‘명동’이라 불리는 골목도 있어, 이곳의 쪽방들은 상대적으로 깨끗하고 층수도 높다. 겨울이면 노숙을 하던 사람들이 들어와 방을 채운다. 가끔은 고시원에 가기도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아무래도 고시원보다는 이곳이 소통도 원활하고 마음이 편해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느낌을 덜 받기 때문이다. 쪽방은 길에서 잠을 자야 하는 ‘노숙 바로 이전의 주거형태’이다. 힘들고 험한 도시의 삶 속에서 사람이 쉴 수 있는 최후의 거주공간인 셈이다. 우리가 쪽방을 함부로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쪽방골목 주변에는 옛 골목을 따라 한옥들이 밀집되어 있다. 체부동만큼 조화로운 풍경은 아니지만, 돈화문로 피맛길에서 뻗은 골목들이 그대로 살아있어 몇 남지 않은 서울의 ‘오래된 골목’이라 하겠다. 밤이면 포장마차들이 골목 사이사이로 화려한 불을 밝히고 피곤한 일상의 회포를 푸는 돈의동 골목. 한번쯤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 |
밤이면 꽃을 피는 돈의동 골목의 야경.
- 글·사진 조정구 / 건축가
- 2000년 구가도시건축(http://guga.co.kr/)을 만들어 ‘우리 삶과 가까운 일상의 건축’에 주제를 두고, 도시답사와 설계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진풍경은 10년간 지속해온 답사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것이다. 대표작으로 가회동 ‘선음재’, 경주 한옥호텔 ‘라궁’ 등이 있다. 라궁으로 2007년 대한민국 목조건축대전 대상을, 2008년에는 안동군자마을회관으로 한국건축가협회 아천상을 수상했다.
실측조사 및 도면 구본환, 조지영, 차종호, 김다연
그래픽 조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