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취미생활 여행

가장 오래된 골목 체부동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1. 10. 18. 12:04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 밖으로 나오면 빵집과 과일가게 사이로 시장이 나타난다. 초입부터 빵 구운 냄새와 싱그러운 과일 향이 가득하다. 시장은 ‘금천교시장’ 또는 ‘적선시장’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과거엔 지금보다 남쪽으로 큰길이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넓은 차도가 생기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효자동 방향으로 좀더 올라가면 등장하는 ‘통인시장’만큼 크고 화려하지는 않아도, 조금은 허름하면서 소탈한 맛이 있는 시장이다. 간장 맛 떡볶이로 유명한 할머니 떡볶이집이 철물점 옆으로 보이면서, 길은 조금씩 인왕산을 향해 구부러져 들어가 배화여대에 이른다.

종로구 체부동 지도 보기

체부동에 있는 가장 큰 '골목마당'. 큰길에서 몇 번을 꺾어져 들어와야 만날 수 있다.

 

 

아홉 번 꺾어 들어가야 이르는 체부동

시장은 마치 작은 물들이 큰물로 모이듯, 여러 곳에서 들고나는 골목길과 통한다. 자칫 지나칠 뻔한 골목 사이로 ‘유성여관’ 간판이 한옥 모퉁이에 조심스레 붙어 있다. 호기심에 골목을 들어선다. 붉은색 벽돌의 교회가 나오고, 골목은 가지 하나를 교회 옆으로 내놓고는 다시 가지를 치며 위로 뻗는다. 골목을 쭉 따라가본다. 처음에는 단순하게만 느껴지던 골목길이 가지를 치고 꺾이기를 반복하더니, 어느새 시장의 소란스러움은 사라지고 아주 조용하고도 한가로운 ‘골목마당’에 이른다. 바로 이곳이 체부동이다. 체부동은 과거의 구곡동과 누각동, 체부동이 합쳐진 동네다. ‘구곡(九曲)’이란 말 그대로 아홉 번은 굽은 길을 꺾어 들어가야 이르는 동네이다. 체부동은 18세기에 제작된 옛 지도 ‘도성대지도’에도 등장한다. ‘體府洞’이라고 쓴 글씨 옆으로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빨간색 선으로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을 정도이니, 당시에도 체부동 골목이 가진 독특한 인상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지금도 구불구불 꺾어진 골목은 가지를 치고, 가지를 친 골목들은 또 저마다의 조그마한 골목마당을 형성하고 있다. 집 앞에 화분이 놓이고, 골목을 둘러싼 기와지붕 위로 이웃집 나무들이 여린 숲을 이룬다. 가운데 조금 넓은 골목마당에는 이웃들과 함께 김장을 담가먹던 시절, 매년 겨울마다 김장용 배추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고 한다.

 

  • 1 세 집이 모인 막다른 골목.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으므로 골목을 자기 집 마당처럼 쓸 수 있다.
  • 2 18세기 후반 제작된 '도성대지도'에 나오는 체부동.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3 금천교시장에서 들어서는 체부동 골목의 입구.

 

 

오래된 골목의 세 가지 조건

그런데 왜 체부동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골목이 되었을까? ‘오래된 골목’에는 나름의 조건이 필요하다. 크게 3가지 정도다. 하나는 골목을 이루는 길이 오래되어야 하고, 둘째로는 건물이 들어선 대지, 그러니까 땅 모양이 가급적 변하지 않아야 하고, 끝으로 셋째는 골목에 모여있는 집들이 대부분 한옥이어야 한다. 이것을 풀어 말하면, 옛 골목길 그대로이고 땅 모양도 거의 변하지 않았고 예부터 한옥이 꾸준히 지어져 온 골목을 오래된 골목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찾아보면 금방 나올 것 같지만, 그리 쉽지가 않다. 디카 촬영지로 유명해진 ‘북촌 한옥마을’ 가회동 31번지는, 알고 보면 1930년대 중반에 약 1만6500㎡(5,000평)이나 되는 땅을 여러 필지로 나누어 한옥을 지은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당시의 ‘신한옥단지’였던 셈. 또한 인사동의 좁은 골목들도 원래는 넓은 대지였던 것이 일제시대 들어와 잘게 쪼개지면서 덧붙여진 모양새를 하고 있다 얼마 전 철거되어 안타까움을 자아낸 바 있는 종로 북쪽의 ‘피맛골’ 역시, 오랜 역사를 가진 골목이긴 해도 막상 남아있는 한옥의 수가 많지 않았다. 좁은 골목 몇 개가 오래된 골목 조건에 부합하는 경우는 드문드문 보여도, 서울시내에 체부동처럼 오래된 골목이 동네 전체에 걸쳐 집합을 이루고 있는 지역은 무척 드물다.

 

  • 1 2001년 이른 봄의 체부동.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앞서 소개한 가장 넓은 골목마당으로 이어진다.
  • 2 2009년 현대.길의 모습은 변했지만,아이들에게 체부동은 여전히 맘놓고 뛰어놀수있는 골목이다.

 

 

1912년 지적원도: 옛 서울의 땅 모양을 기록하다

그런데 길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땅 모양은 과연 변하지 않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마도 서울의 풍경을 이해하려면 이 정도 기초 공부는 하고 가야 할 것 같다. 길과 땅 모양이 옛날과 다름없음을 비교하는 가장 중요한 바탕자료는 바로 ‘1912년 지적원도’이다. 와인도 아닌데 지적도에 특정연도가 붙은 것은, 일본이 우리를 강점하면서 토지조사를 하고 ‘1912년’에 측량을 시작하여 기록한 ‘최초의 지적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지적원도는 폐지적도가 되어 창고에 쌓여 그 쓰임을 다한 듯했다. 하지만 이것을 꺼내어 옛 서울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지도로 재탄생시킨 분들이 있다. 경기대 이상구 교수와 서울 시립대 양승우 교수는 낡은 지적원도를 한 장 한 장 일일이 컴퓨터에 입력하고, 짜맞추는 작업을 수 년에 걸쳐 진행했다. 그 결과, 세세한 길이나 땅 모양, 보이지 않는 하천의 흐름까지 찾아낼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선조들이 옛 서울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더불어 그 흔적들은 현재 어떻게 남아 있는지 길과 골목, 땅 모양을 하나하나 상세히 비교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 1 골목을 실측하고 지금의 모습을 그려두었다. 훗날 골목이 사라지더라도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다.
  • 2 체부동의 어느 한옥집 마당. 가지런한 화분에 2단 장독대가 눈에 띈다.
  • 3 체부동 골목지도에 '1912년 지적원도'를 겹쳐보았다. 옛 골목길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렇게 비교하여 본 체부동에는 새로운 골목이 몇 군데 짧게 붙은 것을 빼고는, 안쪽 깊은 곳까지 옛 골목길이 뻗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현재 남아있는 한옥까지 지도에 겹쳐보면, 정말로 오랜 세월 이 골목을 끼고 세대와 세대를 거쳐 부모와 아이들, 이웃이 얽히어 살아왔음을 깨닫게 된다. 거의 평평한 땅이면서도 체부동 골목골목이 심심하지 않은 까닭은 누구 한 사람의 계획이 아니라, 저마다 땅을 닦고 집을 지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골목이 형성되고, 오랜 세월 소중한 삶의 터전으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체부동

서울시가 발간한 [도심부 도시조직의 원형과 변화](2004, 서울도심부 발전계획)를 보면, 체부동에 견줄 수 있는 서울의 오랜 골목들에 대해 헤아릴 수 있다. 체부동과 이웃한 필운동∙ 누상동∙누하동 일대와 북촌의 팔판동∙소격동, 세운상가 옆 양쪽 블록, 돈화문로 주변 행랑자리 정도가 전부다. 이상구 교수에 따르면, 순라길이 그대로 잘 남아있던 종묘 옆 북서쪽 지역이나 경희궁 옆 내수동 지역은 공원이 되거나 재개발로 사라져, 지금의 체부동 일대가 ‘서울에서 가장 서울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라 한다.

 

8년 전, 체부동 골목을 처음 답사했다. 하지만 체부동 골목이 풍기는 차분하고 깊은 맛이 그 두터운 시간의 누적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였다.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중 지난 겨울부터 주변의 도움을 받아 골목을 기록하고 그리기 시작했다. 길의 세세한 모양부터, 집 각각의 대문 위치, 그 앞에 놓인 화분들, 수도 계량기, 자전거, 빨래, 전봇대, 장독대, 지붕에 덧씌운 천막까지 일일이 실측도면에 담았다. 경복궁에서 인왕산 아래로 수많은 이름의 동네가 자리하고 있다. 체부동에 답사를 간다면, 위로 올라가며 이어진 필운동,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통인시장 등을 같이 둘러보길 권한다. 그곳에서 지금도 ‘살아있는’ 서울의 오래된 동네와 골목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7채의 한옥을 하나로 쓰고 있는 체부동의 한 삼계탕집. 마당의 풍경이 이채롭다.

 

 

 

글·사진 조정구 / 건축가
2000년 구가도시건축(http://guga.co.kr/)을 만들어 ‘우리 삶과 가까운 일상의 건축’에 주제를 두고, 도시답사와 설계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진풍경은 10년간 지속해온 답사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것이다. 대표작으로 가회동 ‘선음재’, 경주 한옥호텔 ‘라궁’ 등이 있다. 라궁으로 2007년 대한민국 목조건축대전 대상을, 2008년에는 안동군자마을회관으로 한국건축가협회 아천상을 수상했다.

실측조사 및 도면 요네다 사치코, 박지형, 이선재, 황주현, 박일향

그림 한재성, 임하은

그래픽 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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