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나들길 르포 2] 호국돈대길
나들길 2코스는 강화도의 관문인 강화대교에서 해안선을 따라 초지대교까지 이어진다. 김포와 강화도 사이의 강처럼 폭이 좁은 해협을 따라 걷는 길이다. 호국돈대길이란 이름은 역사적인 전투가 벌어졌던 돈대(墩臺)가 많아서 붙었다. 돈대는 둔덕에 세운 초소를 말한다.
들머리는 갑곶돈대(甲串墩臺)다. 갑곶돈대는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처음 만나는 강화도의 53돈대 중 하나다. 고려 고종19년(1232)부터 원종11년(1270)까지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몽골과의 줄기찬 항쟁을 벌일 때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갑곶'의 유래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월곶 해안에 이르러 거센 물살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하자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의 갑옷을 한데 꿰어 다리를 만들어도 강을 건널 수 있으련만"하고 탄식한 데서 유래한다.
↑ [월간산]나들길은 덕진진의 남장포대를 지나 초지진으로 이어진다. 왼쪽으로 초지대교가 보인다. |
지금의 갑곶돈대는 1970년대 들어 복원된 것이다. 돈대 안에는 2층으로 된 전시관이 있다.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생활 유물과 고려~조선시대의 도자기류와 생활용품, 서적들이 전시돼 있다.
나들길을 개발한 강화조형예술연구소 김은미 대표의 말에 따르면 정확한 갑곶돈대 자리는 천주교 갑곶성지라고 한다. 돈대 안에는 이섭정(利涉亭)이란 정자가 있는데 과거 사신들을 배웅하던 곳이었단다. 고지도를 보면 과거에는 지금보다 섬의 해안선이 험했으며 다른 곳은 물살이 세 "갑곶만 막으면 들어올 곳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 [월간산]광성보의 무게감 있는 소나무 숲길. 광성보 일대는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미군 함대의 포격에도 물러서지 않았던 어재연 장군의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다. |
나들길은 갑곶돈대 밖에서 시작된다. 돈대나 진지는 입장료를 받는 곳도 있고 무료인 곳도 있다. 2코스에서 갑곶돈대,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은 입장료를 받는다. 주차장 옆에는 비석을 한곳에 모아놓았다. 도열한 빗돌 무리 중에는 금표도 있다. 금표는 주민을 계도하고 경고하는 내용을 적은 비석으로, 요즘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금표 빗돌엔 '가축을 놓아기르는 자는 곤장 100대, 재나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자는 곤장 80대'라 적혀 있다. 곤장 100대면 매우 중한 범죄에 속한다. 가축들의 배설물로 인한 주변환경 오염을 막고, 집에서 일상적으로 나오는 쓰레기를 스스로 처리하게 함으로써 거리를 청결하게 유지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걷기의 시작은 돈대 옆 흙 둑방길을 따르며 시작된다. 강가에 흰뺨검둥오리 가족이 노닌다. 원래 철새인데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로 강화에 눌러앉은 새라고 한다.
차가 쌩쌩 달리는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향한다. 해안 둑방 안에 있는 논은 원래 다 갯벌이었는데 간척된 것이다. 2코스는 다른 나들길처럼 표지기나 이정표가 친절하지 않다. 해안을 따라 남진하는 것이기에 길을 추측하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주로 찻길, 자전거도로, 둑방길을 번갈아 간다.
해안에서 약간 내륙 쪽에 솟은 용진진을 지나 용당돈대로 든다. 진과 보는 군사상 중요한 지역인 해안변방에 설치해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던 군사주둔 시설이다. 진과 보는 강화도의 해안선을 따라 강화53돈대를 관할했다. 조선시대의 군대를 뜻하는 것으로 진은 요즘 군대의 대대, 보는 중대 규모에 해당하며 돈대는 소대 규모의 초소로 볼 수 있다.
작은 바위성인 용당돈대 안으로 들어가자 너른 터가 있고 나무 한 그루가 가운데 서서 돈대를 지키고 있다. 돌담 위에 올라가 흐르는 물살을 보며 한 바퀴 돈다. 특별한 볼거리는 없지만 역사기행 삼아 다양한 형태의 돈대를 하루에 둘러볼 수 있어 좋다. 물길 건너 김포에는 김포CC 골프장의 잔디가 드문드문 자릴 잡고 있다.
오두(鼇頭)돈대는 자라머리처럼 볼록 솟은 지형에 지었다 해서 이름이 유래한다. 원형이며 지름이 32m에 달한다. 원형의 돈대 가운데는 잔디밭이라서 공연을 해도 좋을 성 싶다. 실제로 음악회 같은 공연이 간간이 열린다고 한다. 오두돈대는 용진진이 관할하던 3개 돈대 중 하나다. 지금은 나무로 둘러싸여 주변이 훤하진 않다.
돈대를 내려서자 노거수가 여유롭게 물살을 응시하는 해안이다. 흙이 둑방을 이루고 있는데 '강화전성' 안내판이 있다. 자연스럽게 퇴화된 토성이다. 토성을 길 삼아 걷는다. '오두리 구석마을' 표지석 뒤로 코스모스를 닮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순례객의 마음이 들뜬다. 해안선은 얕은 갯벌이 억새와 어우러져 조화롭다. 광성보는 가장 웅장한 성벽을 자랑한다. 넓은 주차장과 견학 온 떠들썩한 초등학생 무리들만 봐도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고려가 몽골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외성을 쌓았는데, 흙과 돌을 섞어서 바닷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졌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했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김은미씨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무기의 성능과 사정거리가 미군과 상대가 안 되었다. 그럼에도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군인들은 후퇴하지 않고 탄환을 손으로 던지면서까지 싸웠다고 한다. 미군 함대가 이곳에 무차별 포격을 가한 뒤 상륙한 로저스 제독은 돌멩이와 구식총을 들고 싸우다 죽은 350여 명의 조선군 시체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아 "이겼지만 정신적으로 이긴 것이 아니다"고 했다고 한다.
손돌목, 손돌풍, 손돌추위의 안타까운 유래
과거의 처참했던 역사와 달리 광성보 안은 정갈하게 정돈된 공원 같은 분위기다. 숲 속으로 난 반듯한 길을 따라 오르니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다. 숲의 가장 높은 곳에 원형의 성인 손돌목돈대가 있다. 처참한 패배의 얘기를 들어선지 발걸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고요한 분위기는 견학 온 아이들의 뜀박질 때문에 얼마가지 못한다. 어느새 놀이터가 되어버린 돈대의 모습도 나쁘지 않다.
염하 건너편에는 둥근 무덤이 보인다. 손돌의 무덤이다. 고려 때 뱃사공이었던 손돌은 몽골 병사에게 쫓기어 강화도로 피신하는 고종을 모시게 되었다. 배가 물살이 센 데로만 가자 고종은 '이 놈이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싶어 칼을 빼 그 자리에서 손돌을 베었다. 그러나 손돌은 죽으면서도 바가지 하나를 물에 띄우고 바가지를 따라갈 것을 권했다. 이것을 따라간 왕은 강화도로 들어갔다. 왕이 잘못 오해했음을 알고 죽은 손돌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손돌의 묘를 만들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며, 이 좁은 물길을 손돌목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날이 바로 음력 10월 20일인데 여기선 이날 부는 바람을 손돌풍이라 부르고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부른다.
돈대에서 나와 염하로 향한다. 네모 아니면 원형이었던 다른 돈대와 달리 용두돈대는 용처럼 길게 뻗어 있다. 용머리로 이어진 길이 제법 걷는 맛이 있다. 용머리에 닿자 발 아래로 흐르는 염하 물살이 보인다. 위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거칠다. 왕이 오해했을 법하다 싶으면서도 연유도 묻지 않고 베어버린 독단이 안타깝기도 하다. 지금도 김포에서는 매년 손돌의 제사인 손돌제를 지낸다. 돈대를 나와 저어새 모양의 특이한 이정표를 따라 간다. 나들길 초창기에 세운 이정표란다.
염하를 따라 해안선을 이룬 흙성을 밟고 간다. 무덤을 길쭉하게 이어놓은 것 같은 잔디 둔덕이라 나름 재밌게 걷는다. 손돌목돈대를 나와 덕진진 가는 길은 호국돈대길의 하이라이트다. 제방을 따라 뻗은 갈대밭이 계절의 미세한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고 갈대더미로 푹신한 바닥은 침대 위를 걷는 듯하다. 몇 백 미터 지나자 염하와 논의 경계에 흰 돌로 제방을 쌓았다. 연인이 조곤조곤 얘길 나누며 걸으면 좋을 성 싶은 분위기다.
이곳 갯벌에는 칠게가 많은데 이는 멸종위기종인 알락꼬리마도요의 중요한 먹이다. 시베리아로 가기 전 이곳에서 칠게를 먹고 몸무게를 두 배로 불려야 한다. 칠게는 원래 사람이 먹지 않았으나 최근 몇몇 식당에서 칠게를 잡아 튀김 반찬으로 상에 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트인 갈대길이 끝나자 나타난 듬직한 성벽은 덕진진이다. 바위성은 많이 보며 왔기에 눈길을 끄는 건 남장포대다. 일렬로 둥글게 늘어선 대포가 지금도 포탄을 쏠 것처럼 말끔하게 서 있다. 덕진돈대 옆에는 비석이 있는데 섬에 들어오지 말라는 외세를 향한 경고비다. 프랑스나 미군에게 얼마나 실효가 있었을까 싶다.
날머리인 초지진도 앞에서 보았던 요새와 별다를 바가 없다. 진지는 그리 크진 않지만 주차장 같은 주변시설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진지 안에 들어서면 대포가 한 문 있고 성벽에 서면 넓은 염하와 초지대교가 시야에 들어온다. 결사항전을 벌였던 강화의 포성이 발끝에 남아 있다.
걷기 길잡이
갑곶돈대~용당돈대~오두돈대~광성보~손돌목돈대~덕진진~초지진 < 17kmㆍ5시간 30분 소요 >
2코스 호국돈대길은 이정표나 표지기가 많지 않다. 그러나 코스가 해안선을 따라 돈대를 거치며 남진하는 것이기에 길을 찾기 어려운 편은 아니다. 해안선과 돈대를 따라 남쪽으로 간다는 큰 틀을 명심하고 숲길과 해안길, 찻길을 요령 있게 진행해야 한다. 숨이 찬 오르막 없이 대부분 평지지만 땡볕이 많으므로 모자 등을 준비해야 한다. 17km로 코스가 길고 차도가 늘 곁에 있어 중간에 그만 두고픈 유혹을 잘 다스려야 한다.
입장료는 갑곶돈대 900원, 광성보 1,100원, 덕진진 700원, 초지진 700원이며 위 4곳과 고려궁지를 포함한 패키지티켓은 2,700원이다. 완주도장은 출발지에선 갑곶돈대 관광안내소와 진해식당에서 받을 수 있고, 도착지에선 초지진 관광안내소와 매점에서 받을 수 있다. 길 찾기가 어려운 곳에선 2코스 길 도우미(011-9010-1265)에게 연락하면 상세히 알려준다.
교통(지역번호 032)
신촌에서 3000번 버스, 영등포에서 88번 버스를 타고 강화대교 건너 청소년수련관에서 하차해 갑곶돈대로 걸어가면 된다. 초지진에서 갑곶돈대나 강화터미널로 갈 경우 1번 순환버스를 타면 된다. 1번 해안순환버스는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운행한다.
숙박(지역번호 032)
식당은 돈대 주변의 길가 곳곳에 있으나 숙소는 적다. 강화읍에서 가까우므로 읍내의 숙소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나들길 개발자 김은미씨가 1코스 북문 근처에 물길바람길 게스트하우스(070-4253-1285)를 운영한다. 이용료는 1만 원. 갑곶리에는 강화리빙스파랜드 찜질방(933-8980)이 있으며 강화읍에는 강화남산유스호스텔(934-7777), 성산청소년수련원(934-0403) 등의 대형 숙소가 있다. 코스상의 도두리 돈대회식당(937-8872)과 덕성리의 광성보한식전문식당(937-2280)이 유명하다. 민물장어구이가 이곳 별미다. 비교적 저렴한 식당으로 갑곶돈대 인근의 어대감민물장어구이(010-9870-1935)가 있다. 장어덮밥(1만 원), 장어구이 2인분(1kg 4만8,000원), 갯벌장어 2인분(1kg 9만6,000원) 등이 주메뉴다.
↑ [월간산]광성보는 2코스 역사기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곳이다.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어 걷기 좋다. |
↑ [월간산]2코스의 종착지인 초지진. 나무 뒤 둔덕에 세운 작은 성이다. |
↑ [월간산]나무 한 그루가 보초를 서고 있는 용당돈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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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산]갑곶돈대에서 시작되는 나들길. 표지기나 이정표가 적은 편이지만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간다는 틀을 지키면 길찾기가 어렵지 않다. |
↑ [월간산]강화전성의 꽃길. 강화전성은 해안으로 이어진 토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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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산]어대감장어구이집의 장어덮밥. |
↑ [월간산]나들길 도보여권. 지정된 곳에서 출발 도장과 완주 도장을 찍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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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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