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1762~1836)을 빼놓고 실학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시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꿰뚫어 본 위대한 학자였다. ‘개혁군주’ 정조와 함께 배다리를 만들고, 수원성을 축조하며 실학을 꽃피운, 조선 후기 실학의 정점에 섰던 사람이다. 이 위대한 학자의 뛰어난 성취는 17년간의 유배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의 실학정신은 강산이 두 번 바뀌는 긴 세월을 묵묵히 견뎌내면서 얻은 ‘사리’와 같은 것이다. 다산은 신유박해에 연류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됐다. 그 후 만덕산 중턱 초당에서 머물며 실학을 꽃피웠다. 그 고통스러운 유배의 나날을 함께 해준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혜장이다. 다산은 이슥한 밤이 되면 만덕산 자락에 자리한 백련사 혜장을 만나러 산길을 더듬어갔다. 혜장은 언제나 차와 따뜻한 마음으로 다산을 맞았다. 두 사람은 사상과 종교가 판이하게 달랐지만 진심 어린 마음으로 서로를 보듬었다. 어쩌면 다산이 미치거나 혹은, 정치적 항복을 선언할 만큼 고되다는 유배에서 살아남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도 혜장의 덕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고뇌하던 다산의 마음을 헤아리며 걷는 길
다산이 혜장을 만나러 가는 길은 만덕산 중턱에 걸쳐 있다. 작은 고개 두 개를 넘어가지만 노약자도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편한 오솔길이다. 활엽수와 침엽수, 동백나무가 어울린 길은 아늑하면서 깊은 숲의 향기를 전해준다. 이 길을 따라 거닐다 보면 시대에 고뇌하던 다산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오솔길은 다산유물전시관에서 시작된다. 다산유물전시관에서 작은 고개를 넘으면 귤동마을로 이어진다. 길은 마을의 허리춤으로 진입해 곧장 다산초당으로 향한다. 길 초입은 가파른 편. 이 길은 하루 종일, 사계절 내내 어둑어둑하다. 주변이 온통 침엽수와 대나무로 뒤덮여 있기 때문. 제멋대로 휘어지고 꺾인 나무뿌리가 모습을 드러낸 길을 지나면 초당으로 이어진 마지막 계단이다. 그 전에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오솔길 오른편 무덤 앞에 도열한 동자석 두 기다. 이 묘는 다산의 18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윤종진의 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묘인가가 아니다. 동자석의 표정이다. 빙긋 미소 짓는 모습이 천연덕스럽기까지 하다. 다산초당은 깊은 숲에 들어앉아 있다. 초당 마루에 걸터앉으면 푸른 숲이 벽처럼 다가온다. 이 숲은 잠시 머물다가는 이들에게는 아늑한 쉼터가 되어준다. 그러나 15년을 이 벽 속에 들어앉아 있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이보다 완벽한 감옥이 또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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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한 쉼터가 되어주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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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 [丁若鏞, 1762.6.16~1836.2.22]
조선 후기 학자 겸 문신.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 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 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주요 저서는 [목민심서], [경세유표]등이 있다.
- 혜장 [惠藏, 1772~1811]
조선 후기의 승려로 즉원(卽圓)의 법을 이어받아 대둔사의 강석(講席)을 맡았다. 저서에 [아암집(兒庵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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