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와 잤다. 딱히 자랑할 것도 없는 하룻밤이었다. 평소 일종의 성적 긴장이 존재하던 사이, 술이 한두어 잔 들어가고 밤이 깊어지자 성적 긴장은 더욱 팽팽해졌고 그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말들이 기분 좋게 내 귓가를 간질였다.
결정적으로 그 남자와 잔 이유는 우리의 입장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외롭지만 연애는 하고 싶지 않고, 열렬하고 뜨거운 연애가 아니라면 무가치하다고 믿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사랑받고 싶은 남자와 여자. 서로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연애를 할 만큼 좋아하지는 않는, 따라서 마음껏 쿨해질 수 있는 사이.
"재워줘요"라고 그가 먼저 말했고 흔쾌히 "그래요"라고 내가 답했다. 방금까지 다정하게 나누던 속깊은 이야기의 연장처럼 우리가 함께 잠든다면 오늘밤 발끝 시리지 않고 따뜻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뒤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너 걔랑 잤다며?" 그는 최근 들어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는 듯 실실 웃고 있었다.
아……, 온몸으로 받았던 따뜻한 위로와 오랫동안 조용히 간직하고 싶었던 기억이 모멸감과 자책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다. 그가 정말 좋은 밤이었어, 라고 말했든 걔 생각보다 섹스 별로더라, 라고 말했든 또 한 여자랑 잤다고 자랑했든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는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고 남자랑 자고 난 뒤 난생 처음 후회했다.
남자들은 정말 입이 싸다. "나 어젯밤에 걔랑 잤다, 정말 끝내주더라." "걔는 얼굴은 예쁜데 자면 잘수록 안 땡겨." "그 여잔 (섹스를) 너무 밝혀." 야한 이야기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남자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그녀들의 이야기를 판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잘 알지도 못하는 그녀들이 참 안타깝고 민망했었다. 어쩜 지지리 복도 없어 저런 남자들을 만나 밤을 보낼까.
하지만 그 밤들, 그녀들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날 밤 작은 손길에도 속수무책 떨던 '여자'였지만 당신이었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았다. 벗은 속살, 함부로 내어준 입술 같은 것은 오롯이 당신에게만 보여준 것이었다. 그때만큼은 진심이었기에 후회될 것도 민망할 것도 없었다.
어떤 형태로든 살 부대끼면서부터 우리는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그걸 입 밖으로 내놓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져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거 같았던 그 밤과 모든 게 자연스러웠던 분위기, 온몸 구석구석으로 전해지던 따뜻하고 편안한 체온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아무 의미 없이.
비밀을 지켜다오. 그녀와의 하룻밤은 남들 앞에서 자랑하면서 곧추세울 수 있는 남자다움이나 매력보다도 더 소중한 거라는 것을. 그건 하룻밤 완벽하게 정인이었던 서로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을. 그녀의 죄라면 당신과 하룻밤을 함께 보낸 것밖에는 없다. 겨우 그 이유로 그녀를 모독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