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지현의 에로틱 칵테일

(15) 남녀가 정말 손만 잡고 잘까?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2011. 2. 19. 18:43

(15) 남녀가 정말 손만 잡고 잘까?

"덕수궁 돌담길에서 아무 여자와 꼭 껴안고 잠들고 싶다." 어느 소설에 나오던 문구를 몇 년 동안 읊어대던 선배가 있었다. 그와 이야기할 때마다 "그건 판타지지. 아니 남녀가 함께 누워 있으면서 어떻게 꼭 껴안고만 자? 그럴 리가 없을뿐더러 그래서는 안 되는 거지. 그건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항변하던 나였다.

그러던 내가 한 남자와 난생 처음 섹스 없이 꼭 껴안고만 잤다. "요새는 섹스하는 것보다 팔베개하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면서 자는 게 제일 그리워." 아마 그의 이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말은 섹스가 주는 쾌락에 천착하느라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육체의 따뜻함과 다정함을 고스란히 상기시켰고, 그 순간부터 남녀를 뛰어넘어 한 사람의 품안에서 편안하게 잠들고 싶다는 욕망이 절절해졌다.

내가 아무리 '여자들에게 성욕을 허하라'라고 핏대를 올린다고 하더라도, 최근 들어 애정 없는 섹스의 건조함과 허무함을 매일매일 상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때는 나도 "섹스 후의 다정한 후애가 제일 좋더라"라고 말하고 다닐 때가 있었다. 하지만 애인이 아닌 남자와 자기 시작한 후부터 나에게 후애는 의미 없어졌다.

방금까지 뜨겁게 불타올라서 서로의 육체를 탐했던 우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색해져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급하게 옷을 꿰차고 담배를 물거나 샤워하러 가거나……. 그럴 때마다 남자의 성욕에 이용당한 것 같아 스스로가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이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나는 그들에게 섹스 후의 팔베개를 허락하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그건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눌 수 있는 특권이요, 따라서 애정 없는 섹스에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금기처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섹스를 끝내는 순간이면 곧바로 '어떻게 하면 이 남자를 자연스럽게 내 집에서 쫓아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그날 밤 그는 오래 사귄 애인처럼 나를 꼭 껴안아주었다. 나는 그 품이 참 낯설면서도 기분이 좋아져 고양이처럼 엉겨붙어 그의 어깨에 깊이 얼굴을 부벼댔다. 그의 심장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낯선 남자 품에 안겨 있으니 나는 자꾸 몸을 뒤척였고, 뒤척일 때마다 내 몸 구석구석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약속대로 섹스 없이 서로를 다정하게 껴안고 손을 맞잡고 낮게 키득거리다 어느새 까무룩 잠들었다.

우리는 그 밤 성욕에 눈먼 남과 여가 아닌 참 외로운 두 명의 인간이었고, 나는 그의 품속에서 충분히 위로받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다정한 손길, 부드러운 숨결이 주는 치유의 힘을 다시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때로는 육체적인 오르가슴이 아닌 정신적인 오르가슴이 필요하다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