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뒤늦게 첫 유럽여행을 떠난 친구가 호들갑스럽게 전화를 걸어왔다. "여기는 정말 동양 여자들의 천국이야. 길거리 지나다니면 모델처럼 생긴 남자들이 수시로 말 걸고 술 마시자고 하고...... 한국에서 노처녀 취급 받다가 이런 대접 받으니까 황홀해 죽겠다. 나 여기서 아예 살까봐." 통화료도 비쌀 텐데 굳이 전화를 걸어 자랑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들뜬 듯하다.
나 역시도 혼자 떠난 첫 유럽여행 때 그랬다. 스크린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키 크고 각 잘 잡힌 몸매에 신비한 눈빛, 눈코입이 기막히게 입체적으로 박혀 있는 외국 남자들을 바라만 봐도 눈이 즐거웠고 그런 남자들이 말이라도 걸어오면 왠지 내가 예쁘고 매력적인 동양 여자가 된 것 같아 자부심마저 느꼈다. 그래서 나는 외국 남자들을 보면 상냥한 웃음을 띠고 "하이~" 하고 반갑게 인사도 해주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여느 때처럼 여행지에서도 패션을 고수하는 한국 여자답게 예쁘게 화장을 하고 무릎 위로 올라가는 스커트를 입고 유럽 한복판을 홀로 거닐고 있었다. 50대로 보이는 외국인이 "헬로~" 하며 인사를 했다. 반갑게 마주 웃으며 "헬로~" 하고 지나가려는데 그가 나를 끌어당기며 뭐라고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안 되는 영어 실력으로 열심히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데, '호텔' '같이 가자' '하우 머치'....... 아뿔싸, 그는 나를 창녀로 본 것이다! 여자로 살아온 평생에서 가장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제야 나를 바라보던 친절했던 서양 남자들의 눈빛에 숨은 의미가 보였다. 서양 남자라면 무조건 들뜬 눈빛을 날리는 여자들, 조금만 잘해주고 웃어주면 하룻밤 잘 수 있는 여자들, 서양 여자들보다 순종적이면서 내숭 떨며 튕기는 게 자극적인 동양 여자들. "사람이 어떻게 만날 밥만 먹어, 가끔 라면도 먹어줘야지"라는 영화 속 대사를 그들이 마음속으로 읊는 게 보였다.
하긴 말도 잘 안 통하고 문화도 다른 서양 남자와 동양 여자가 여행지에서 첫눈에 사랑에 빠져 해피엔딩을 맞이한다는 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모든 건 색다른 걸 맛보고 싶어하는 섹스의 문제였던 것이다.
나는 '그런' 동양 여자인 게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고 그 뒤 나의 여행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나를 창녀 혹은 헤픈 동양 여자로 볼까봐 시선을 떨구고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다녔다.
한국 남자나 외국 남자나 남자들은 다 똑같다. 그들의 주 관심사는 역시 섹스이고 어떤 여자와 어떻게 하면 더 쉽게 섹스할 수 있는가, 더 다양한 섹스를 하기 위해서는 무얼 해야 하는가를 본능적으로 안다. 그리고 "동양 여자애랑 해봤는데 어떻더라~" 하며 떠들어대는 것도 똑같다.
친구에게 그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한참 들뜬 그녀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어서 여행을 망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또 한편 우리들의 순수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자기들 멋대로 동양 여자들을 갖고 낄낄거릴 그들을 생각하면...... 아, 너무 억울해서 오늘 밤에도 잠들기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