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그날 밤, 엇갈린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생각
어쩌다 우리가 단 둘이 술을 마시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1년 전부터 종종 술자리에서 만나긴 했지만 그건 옛 직장 동료들과의 모임자리였고, 단 둘이 이야기할 분위기도, 상황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어쩜 사람들이 이렇게 약속을 잘 깨냐, 못 나올 거면 미리 말해주든가' 하며 모임 사람들의 뒷담화를 했고, 이내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직원들에 대한 하소연, 일을 열심히 해도 월급이 안 오른다는 신세 한탄을 했고, 그의 결혼 생활은 어떤지 또 나의 싱글 생활은 어떤지 우스갯소리 섞어가며 일상을 나누었다.
그리고는 잠시 침묵, 그가 문득 물었다. "그때…… 왜 그랬었어요?"
사실 우리는 6년 전쯤 만났고, 그는 처음 본 순간부터 저돌적으로 대시를 해왔다. '여자는 10번 찍으면 넘어오게 마련이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법 없다'며 들이대는 게 마초 같으면서도 귀여운 면이 있는 남자였다. 당시 애인이 있던 나는 1년간 튕기다가 실연의 고통에 시달리던 어느 날 그와 잤다. 그런데도 우리는 연인이 되지 못했다.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은 나로서는 한 번 자고 나더니 감정이 식은, '먹튀남' 정도로 그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왜 그랬었냐니?
사실인즉슨, 그날 우리는 해가 뜰 즈음까지 진지하고 속깊은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부드러운 키스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섹스를 했단다, 그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좋았단다, 그가 물었단다, "회사에 행사가 있는데, 가지 말까?" 그런데 내가 아주 무심하고 쿨하게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왜? ……가요." 우리집 문을 나서며 그는 생각했단다. '내가 이용당했구나, 저 여자에게는 내가 그저 원나잇 상대였구나, 저 여자는 하룻밤 외로움 달래보자는 거였구나.' 심지어 문자와 전화에도 답변 없는 걸 보고 철저히 마음을 접었다고, 만약 그날 내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와이프는 당신이 될 수도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오히려 그를 탓했다. 왜 그날 새벽 나를 내버려두고 가버렸는가, 왜 행사가 끝나자마자 나를 보러 오지 않았는가, 왜 절절하게 나에게 매달리지 않는가, 날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몇 번 튕겼다고 지레 나가떨어지는가.
나는 그날 그가 대리운전을 부르는 동안 몰래 도망쳤다. 내 오래 전 이기심과 오만함에 대하여 충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왠지 애틋하고 안타까운 감정이 생기면서 다시금 그가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고, 게다가 우리는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만큼 너무나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망친 건 잘한 선택이었을 게다. 그날 우리가 사고를 쳤다면, 우리의 기억은 또 엇갈렸을 것이다. 그는 마누라 말고 다른 여자랑 자고 싶었던 남자로, 나는 추억만으로 남자에게 함부로 안긴 쉬운 여자로.
애틋하고 아쉬운 채로 헤어지길 정말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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