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사람들은 그곳을 그냥 ‘돌산밑’이라 불렀다. 무슨 리(里)나 동네 이름도 붙이지 않고, 말 그대로 ‘돌산 아래 어떤 곳’을 칭하는 듯했다. 이화동과 같이 서울 동쪽 성곽에 등을 마주 대고 있는 창신동, 그 안쪽 그늘지고 주름진 동네 깊은 곳도 모자라, 깎아지른 화강암 절벽 아래로 저마다 다양한 형상의 집을 짓고 살고 있는 동네를 발견한 것은 흥미를 넘어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 |
창신동 지도 보기
돌산밑 한가운데서 본 동네의 전경. 절벽 위에도 2,3층짜리 주택들이 보인다.
숨겨진 동네 ‘돌산밑’으로 가는 법
서민의 동네 창신동은 복잡하고 분주하다. 작은 봉제공장들과 집들이 함께 있는 이곳은 사람만큼이나 자주 오토바이가 다니고, 넓지 않은 길가에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로 인해, 굴곡이 심한 지형은 더욱 깊고 그늘져 있다. 예전부터 내려오던 구불구불한 골목들과 지금도 활발한 재래시장, 크고 작은 땅을 여럿으로 나누어 들어선 주택과 공장들,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산 위에 지은 25동의 낙산시민아파트까지, 복잡하게 얽힌 시간의 흔적은 이곳에 들어선 누구라도 자기가 선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창신동 안쪽으로 깊이 자리 잡은 ‘돌산밑’을 찾아가려면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동대문역 3번 출구 근처 창신시장 입구에서 시장길을 따라 쭉 올라가는 루트이다. 시골 장터 같은 창신시장에는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흥미로운 것이 많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초입에는 그 유명한 네팔요리점 ‘에베레스트’와 80년 전통의 한증막 ‘동호한증원‘이 자리하고, 중간에는 ‘매운족발’ 집들이, 그리고 끝 부분엔 구수한 냄새가 길가에 떠도는 순대국집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장이 끝나고, 걷던 방향으로 계속 올라가면, 모든 집들과 길들이 한군데로 몰린 것 같은 ‘육거리’가 나온다. 바로 이 육거리에서 3시 방향으로 뻗은 길을 따라 가면 그 끝에 ‘돌산밑’이 자리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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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창신시장 틈새로 보이는 작은 골목 안에 줄지어 있는 한옥들.
- 2 창신시장의 풍경과 그 틈새로 보이는 작은 골목의 입구.
- 3 창신길 입구에 있는 창신사진관과 원경으로 보이는 흥인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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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산밑 근처에 있는 파출소 앞 삼거리.
또 하나는 ‘창신길’을 따라 올라가는 방법이다. 동대문역 1번 출구를 나와 뒤로 돌면 창신사진관이 보인다. 사진관을 마주하고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바로 창신길로 길가에는 3층 높이의 건물들에 가게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1,000원에 3개를 주는 빵집, 커다란 향나무에 잡목이 우거진 오래된 한옥 앞을 지난다.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길고 높다란 나무가 서 있는 파출소가 나오고, 옆으로는 골목 입구에 천막을 친 가게를 중심으로 삼거리가 보인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서 있는 사이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어느 순간 2,3층 높이의 건물들 위로 거대한 돌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풍경과 만나게 된다. 바로 그곳, 창신동 595번지 돌산밑에 다다른 것이다. | |
조선 총독부를 지은 돌을 캐던 채석장
“아마 45년쯤 전이었을 거예요. 사람들이 깜깜한 밤에 나타나서, 집을 짓는다고 여기 비어 있던 채석장 땅에다 줄을 긋고 난리가 아니었어요. 얼마 있다가 천막집들이 들어섰죠.” 마을 한가운데 옛 공동수도 자리-지금 시온이발관 앞에서 만난 산 위쪽에 사신다는 아주머니는 이렇게 기억을 더듬어 말씀해주셨다. 채석장 자리는 60년대 중반 사람들에 의해 점유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답사를 통해 70년대에 들어서서, 양성화사업이 펼쳐지고 불법건축물을 콘크리트나 벽돌로 튼튼하게 지어 이를 불하받는, 즉 국가나 시로부터 땅과 건물의 권리를 사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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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돌산밑 마을 입구에서 창문 밖으로 수건을 말리고 있는 이발소.
- 2 가지각색의 페인트로 장식된 돌산 밑 마을 아랫집의 축대.
- 3 경향신문 1975년 3월 11일자 신문에 나온 돌삼밑 마을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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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동네가 들어서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옛날 이곳에는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도당(都堂)이 자리했다. ‘낙산 산신령’이 모셔져 있어 점괘가 영험하기로 소문이나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무속인과 점술가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가까이 안양암에는 지금도 암석을 파내어 감실을 만들고 부처님을 새긴 ‘석감마애 관음보살상(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2호)이 있다. 커다란 돌산은 우리 조상에게 깊은 신앙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식민지가 된 후 상황은 급변한다. 일제는 1910년에서 1920년대 후반까지 식민도시 경성의 기반을 다지는 대형건축물들을 차례로 짓기 시작한다. 대부분 서구의 건축양식으로 지은 ‘석조 건축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1912년 조선은행(한국은행), 1925년 경성역(구 서울역), 1926년 경성부청(서울시청) 그리고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인 조선총독부가 1926년에 10년간의 공사를 거쳐 완공된다. 동대문 바로 밖이라는 최적의 입지를 가진 창신동 돌산은 1924년 경성부 직영 채석장으로 탈바꿈되어 매일 같이 발파와 석재채취가 일어나는 아수라장 같은 장소가 된다. 그리고 거기서 떠진 돌들은 장엄한 조선총독부 건물에 한 부분을 이루기 위해 경복궁 경내로 운송되었다. 해방 후에도 얼마간 채석장은 쓰이다 60년대 이후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는 절벽에서 암석이 굴러 떨어져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등의 사건기사로 간혹 신문에 그 존재를 알리기도 하였다. | |
돌산밑과 주변을 표현한 지도그림. 노랗게 골목길을 칠한 곳이 돌산밑이다.
‘돌산밑’ 진기한 집들의 전시장
하늘에서 본 돌산밑은 물음표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원형으로 절개된 곳과 그 아래 나머지 절개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원의 크기는 대략 직경 100m 정도로, 높이 40m 안팎의 절벽이 동네를 에워싸고 있다. 그 중 남서쪽 방향으로만 열려 있어, 지금도 동네로 들어가려면 여기를 거쳐야만 한다. 길 모양은 마치 하나의 몸통에서 나무 가지가 뻗듯이 크게 둘로 갈라져, 끝으로 가면 잔가지처럼 작은 골목들로 나뉘고 있다. 대체로 골목들은 막다른 길이지만, 다른 길들과 가늘게 연결된 경우도 있다. 한편 동쪽과 서쪽 절벽에 돌산 위쪽으로 통하는 계단길이 나 있는데, 하나는 연립주택 마당으로 통하고, 다른 하나는 98년에 철거된 낙산시민아파트 자리에 들어선 공원과 연결되어 있다. 채석장이 있던 시절부터 두 길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 |
돌산밑에 있는 특이한 모양을 한 두 집의 입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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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사진 골목길을 따라가다 만나게 되는 독특한 인상의 집들.
- 2 이리저리 얽히듯 연결된 계단 사이로 비추는 햇살.
- 3 역동적인 공간을 숨겨두고 있는 얌전한 집의 겉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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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산밑 여기저기에는 복잡한 계단을 가진 특이한 모양의 집들이 많다. 그냥 보기에는 여러 차례의 증축을 거쳐 그러한 모습이 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난간의 모양이 같거나 대문이나 기타 장식 또한 비슷하게 통일되어 있어, 대체로 한꺼번에 2층이나 3층으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70년대 건축물 양성화과정에서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공사비를 충당하거나 세놓을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한 번에 높이 지은 까닭이라 생각된다. 좁은 대지에 계획을 세워 집을 짓기보다는, 주어진 현장 조건에서 방을 놓고 계단 위치나 올라가는 방법을 구상하여 자생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 결과, 때로는 기괴하고 때로는 매우 극적인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들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
그 중 돌산밑 입구 근처에 있는 어느 집에 들어가 보았다. 아래 1층과 2층에는 봉제공장이 있고, 위 3층과 옥탑방에는 잘게 여러 세대로 나뉘어 주거가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압도적인 것은, 3층 높이의 하늘로 열린 마당에 이리저리 얽히듯 연결된 계단이 자아내는 다이내믹한 풍경이었다. 집의 겉모습은 얌전했지만 그 속에는 봉제공장의 미싱 소리처럼 역동적인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끝으로 돌산밑 풍경을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것이 있다. 돌산밑에 펼쳐진 다양한 집들 뒤편, 수십 미터의 절벽 위에 다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2층이나 3층으로 올라서 있는 집들이 바로 그것이다. 1970년대 초, 돌산밑을 제외한 그 위쪽 언저리에 길을 닦고 땅을 나누어 분양한 집들로, 지도로 보면 정연하게 들어선 주택가로 보이지만, 실제로 가보면 많은 집들이 한 층도 넘는 축대 위에 지어져 있다. 그 풍경 또한 너무도 강렬하여 우리 답사 일행은 이곳을 ‘축대마을’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창신동 주민들의 일상의 공간과 함께 다루어 볼 생각이다. | |
돌산밑 위쪽에 있는 일명 '축대마을' 모습.
- 글·사진 조정구 / 건축가
- 2000년 구가도시건축(http://guga.co.kr/)을 만들어 ‘우리 삶과 가까운 일상의 건축’에 주제를 두고, 도시답사와 설계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진풍경은 10년간 지속해온 답사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것이다. 대표작으로 가회동 ‘선음재’, 경주 한옥호텔 ‘라궁’ 등이 있다. 라궁으로 2007년 대한민국 목조건축대전 대상을, 2008년에는 안동군자마을회관으로 한국건축가협회 아천상을 수상했다.
실측조사 및 도면 요네다 사치코, 강동균, 김송수, 양수민, 장동연, 최지희, 하야시 히비키, 이창규, 최윤정, 박우린
그래픽 조지영